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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전후 세대들의 회한/김사인 문학평론가(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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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전후 세대들의 회한/김사인 문학평론가(시평)

입력
1993.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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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강형철·고형렬의 시 『마흔 다섯은 귀신이 와 사는 것이 보이는 나이』라고 미당이 썼던 바 있지만, 이제 마흔의 나이에 당도한 이 땅의 시인들은 어떤 몸가짐과 표정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가. 「깨끗한 그리움」(하종오)과 「야트막한 사랑」(강형철), 「사진리 대설」(고형렬)을 읽은 후 떠오르는 것은 시들 하나하나의 성패가 아니라, 그 시집들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회한 또는 막막함의 인상이며, 그것은 마흔이라는 연륜―그것도 이 나라에서 마흔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나이 마흔이 되니 어린 날이 그립다. 그때의 풍광과 사람들이 한정없이 그립다. 그런데 나는 실패해 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소멸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하종오, 후기) 이런 쓸쓸한 고백과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는데 송두리째 바쳐져 있는 하종오의 시집은, 과연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그의 추억들에는 어떤 윤택함이나 감미로움도 깃들여 있지 않다. 말들은 서로 조금씩 어긋나 버석거리고, 영남방언형 어미들은 깊은 곳까지 스미지 못한 채 시의 표면을 떠돈다. 이러한 자신이 시인에게도 원동할 터이지만, 그러나 달리 어떤 자세가 가능했을 것인가. 무엇이 청년 하종오의 열정을 거두어 갔나.

 시집의 제목과도 같이 몸을 「야트막하게」낮춤으로써 자신과 시와 세상을 견뎌내는 지혜가 강형철에게는 터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수수한 매무새와 겸손의 간피에서, 아직 삭이지 못한 분노와 의욕이 때로 꿈틀거린다. 자신의 야트막함이 경우에 따라 굴욕임을 아는 까닭이다. <이게 삶은 아냐  본격적인 인생은 아직 남았어  삶이 이렇게 하찮다니  속내에 감춘 생각을 되뇌이면서  문득  너무 멀리 와버렸다>  「늦가을에」는 시가 책의 책머리에 놓인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시인 또한 내년으로 40인 것이다.

 이 점 고형렬도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오늘 나 여기서 노래 하나 부르니  모래밭에 우수 지나 밤섬은 후회만 가득해  …  저 건너 강심 한가운데 바람만이 스치우고 모두 떠난 빈 백사장에 흰 봄빛만 놀고 있구나>  「우수」 시집의 첫 시이다. 달관의 몸짓으로 그는 자신의 분노와 좌절과 외로움을 얼버무려 보는 것이지만, 그때 그 달관의 포즈란 몹시도 애달픈 것이다.

 이 세 시인으로 40세 전후 세대의 우리 문학이 모두 대변될 수는 없을 터이지만, 그리고 이 세대들만이 유독 불행했다고 말하는 것도 소아병적인 과장이 되고 말 것이지만, 그러나 좀더 많은 격려와 갈채가 이 세대들에게 보내지기를 바란다. 이들은 자신의 꽃답던 시절을 시로 살아와, 이제는 「팔자를 고쳐」볼 수도 없는 나이 마흔에 이르러 있으며, 밉든 곱든 우리 시는 이들을 포기할 수 없다. 20대 후반과 30대를, 긴급조치와 광주의 죽음들과 동구의 좌절에 함께 실어 보내고, 이들은 「늙음」에 대한 어떤 자랑도 명분도 없이 다만 살아, 속절없이 여기에 이르러 있다. 이 막막한 견딤이 보람없는 것이기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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