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파 세력의 제거를 통해 새로운 근대국가를 세우려 했던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은 외세 의존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이다. 세계열강의 침략적 촉수가 어지럽던 우리역사의 여명기에 갑신정변의 중심에 섰던 김옥균의 삶은 사회적 진보와 국권수호를 위해 뜨거운 포부와 사상을 가졌던 한 혁명가의 대담한 시도와 「삼일천하」적인 성공, 처절한 좌절로 점철돼 있다. 내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1백10년, 김옥균이 한중일의 공모에 의해 암살된 지 1백주년이 되는 해이며, 올해는 문민정부에 의해 새로운 미래상이 의욕적으로 펼쳐지는 「개혁의 해」이다. 김옥균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과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의 구도 등을 한국과 중국, 일본등의 현장취재를 통해 재조명해 본다. 지지기반이 허약했기 때문에 비참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한 선구적 인간이 지녔던 빛나는 이상은 세월에 의해 빛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편집자주】◎민씨일가,갑신정변 복수심… 홍종우에 밀명(미운오리 김옥균 죽어라:상)
김옥균·박영효등 개화파에 의해 거사된 갑신정변은 민씨 세도를 배경으로 한 수구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대사건이었다.
세자빈의 아버지이자 수구파의 거두인 민태호는 물론 민영목, 조녕하,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등 6명의 수구파 요인이 살해당했고 민비의 친정조카 민영익은 중상을 입었다.
민씨 일가가 갑신정변 직후부터 일본으로 도망친 정변의 주모자들에 대해 집요하고도 서슬퍼런 복수의 칼을 갈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민씨 일가에 아부해 출세하려는 정상배들이 이 계획에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이 정상배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일식이었다. 그는 앞서 살해당한 민태호의 친조카이자 민규호(우의정)의 아들인 민영소를 만나서 일본에 망명중인 개화파 요인들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았고 1892년 4월 장사꾼으로 위장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 즈음 출세욕에 불타는 홍종우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 길에 일본에 도착한다.
김옥균 암살의 두 주역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홍이 적임자라고 판단, 1893년 2월 김유식이란 한국인이 살고있던 동경시 소석천구 천야롱장 하숙방에서 첫 대면을 한다.
이들 간에는 김옥균 박영효등이 일본에 망명해 살고 있고 한국의 조정을 민씨 일파가 쥐고 있는 이상, 한일관계는 물론 동양전반의 평화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밀담이 오고갔다.
이일식은 『이같은 사실은 국왕 폐하께서도 심히 우려하는 바로, 나는 국왕폐하의 밀명에 따라 이 역도들을 처단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말했고 홍종우는 암살계획을 흔쾌히 승낙했다.
◎일서 함께온 정객 총탄맞고/도착 하루만에 여관방 비운/시체는 서울양화진 실어와 “모반대역 능지처참”
김옥균이 최후를 맞은 암살현장에는 그의 비극적 생애를 더듬어 볼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중국 상해시의 하남북로와 북소주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던 뚱허(동화)양행 자리 위로는 지난 1백년 동안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겹쳐지면서 그 흔적들을 지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인도와 차도의 구별도 없는 그 길 위로 사람들과 자전거, 자동차가 뒤섞여 분주히 흘러오고 흘러갈 뿐이다.
국제도시였던 상하이답게 일본인, 인도인 등이 집단거주했던 이 일대는 1920년대에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이 벌어졌고 지금은 우울한 빛깔의 시립병원과 인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894년 3월 25일 일본 고베(신호)를 떠난 일본 우선회사의 우편선 세이케이마루(서경환)호가 상하이 부두에 도착한 것은 27일 하오였다.
승객들이 시끌벅적한 부두 위를 잰 걸음으로 흩어져 갈 때에야 배를 나서는 네 명의 일행이 있었다. 양복 차림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콧대가 높고 살결이 흰데다 눈이 번득여 매우 비범해 보였다.
일행은 미국 조계인 북하남로(현 하남북로)의 뚱허양행 2층 방에 투숙했다. 숙박부에는 이와타(암전삼화·44), 기타하라(북원연차랑·22), 다케다(죽전충일)(40), 청국 공사관 서기 우푸런(36) 등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튿날 아침, 동료처럼 보였던 이들의 모습은 전날과는 달리 신분상의 상하가 뚜렷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1호실에 투숙했던 이와타는 10년전 조선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삼일천하를 끝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이었다. 3호실에 투숙한 다케다는 본명이 홍종우라는 한국정객이었고 기타하라는 10년 동안 김옥균을 수행한 일본청년이었다.
하오 1시부터 시내 구경을 하기로 된 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홍은 김옥균이 준 5천원 짜리 수표를 소동문 밖의 천풍전장에서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나갔고 중국인 우푸런은 김옥균의 부탁으로 중국 옷을 구하러 나갔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제일 일찍 나갔던 김옥균이 『몸이 불편하다』며 먼저 들어왔다. 홍이 곧 돌아와 『천풍전장 주인이 때마침 외출해 저녁 6시께나 돈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고했다.
하오 3시.
수행원 기타하라가 김옥균의 심부름으로 세이케이마루호의 마쓰모토(송본) 사무장을 부르러 1층 사무실로 내려간 사이, 한복으로 갈아 입은 홍이 김옥균의 방으로 들어갔다.
「탕」
총알이 서쪽 창가의 등나무 침대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김옥균의 왼쪽 뺨을 뚫고 오른쪽 이마를 관통했다. 머리에서 선혈이 흘러 나오고 김옥균은 괴롭게 몸을 비틀었으나 자객이 계속해 쏘는 총탄은 다시 그의 배를 뚫었다. 이어 등 뒤에서 발사된 세번째 총탄이 좌측어깨를 관통했다.
밖에서 폭죽놀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기타하라는 홍이 허겁지겁 나가는 것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급히 뛰어올라간 그는 세발의 총탄을 맞고 피하려다 동쪽 끝의 5호실 앞에서 뒨굴다 숨진 김옥균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했다.
김옥균 암살사건을「고려 반신 김옥균 암살에 대한 상보」라는 제목으로 열흘 이상 집중보도한 당시 중국의 최대 신문「신보」(1894년 3월30일자)와「김옥균전기」(을유문화사간)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그의 최후이다.
『상하이 북소주로와 북하남로가 만나는 사거리에 일본인이 경영했던 뚱허양행이 있었다』 김문길교수(부산외대)가 일본인 사학자 다보다의「근대 일지선 관계연구」를 인용해 알려준 위치를 더듬어 찾아갔다. 암살현장에는 아직도 하남북로와 북소주로가 남아 있었지만 뚱허양행은 아무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았다.
국가기관으로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서가회(상해시 조계북로 80호)에서 찾아낸 김옥균 암살기사도 뚱허양행의 위치를 단지 북하남로로 밝히고 있었고 상하이 최고의 명문대학인 복단대의 역사학 교수들도『김옥균이란 인물이나 뚱허양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대답을 되풀이했다.
주민 수십명에게 수소문한 끝에 겨우 만난 진설정씨(85·여)가『현재 상하이 제일인민병원이 들어선 자리에 큰 여관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소중한 증언을 했다.
장강(양자강)의 지류인 소주하에는 흐린 날씨 아래 현대화의 부산물인 탁류가 출렁이고 있었고 북하남로는 소음과 매연 속에 싸여 있었다.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꿈꾸며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그것도 동행한 홍종우의 총탄에 쓰러진 이유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연구들은 대체로 암살사건의 사후 처리과정을 볼 때, 갑신정변 당시 민씨 일가를 통해 권력을 쥐고 있던 청국과 김옥균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를「미운 오리새끼」취급했던 일본의 묵인 아래 민씨 일가의 사주를 받은 출세주의자 홍종우가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해 3월29일 피투성이가 된 김옥균의 시체는 수행 청년인 기타하라의 손으로 입관되었다.
며칠 후 그들이 타고왔던 세이케이마루호로 다시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상하이 부두로 운반됐다.
그러나 「서류가 미비하다」는 거류지 경찰의 지적에 따라 기타하라가 일본 영사관을 방문한 사이 시체는 청국 관헌에게 인도됐다.
며칠 뒤 황해를 건너는 청국 군함 웨이위안(위원)호에는 홍종우가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있었고, 4월 14일 서울 양화진에는 사지를 찢고 목을 베어 매단 참혹한 모습의 시체가 버려졌다. 곁에는「모반대역 불도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불대시 릉지처참」이라고 쓴 목패가 달려 있었다.【상하이=서사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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