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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브룬너저 「정의와 사회질서」(다시보고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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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브룬너저 「정의와 사회질서」(다시보고싶은 책)

입력
1993.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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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보다 신념중시 「정의론」 펼쳐/“근본방향은 보편적 공동선” 역설/“사랑도 밑바탕엔 정의 깔려있어야” 주장 법학자로서 나는 정의에 대하여 가장 많이 생각하고, 읽고, 스스로 정의론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머리속에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정의에 관한 책은 법학자가 쓴 책보다는 신학자 브룬너(EMIL BRUNNER·1889∼1965)가 쓴 「정의와 사회질서」이다. 브룬너는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에서 신학과 사회윤리를 가르치고 동대학 총장까지 지낸 저명학자이다.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신학」에 속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연계시를 인정했기 때문에 바르트(KARL BARTH)와 논쟁을 한것은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이론 보다도 나에게 관심을 끄는것은 그가 1943년에 정의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독일어 원명은 「정의」 (GERECHTIGKEIT)인데, 영어본에서 「정의와 사회질서」 (JUSTICE AND SOCIAL ORDER)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선 전택부선생이 6·25동란중 피란처의 지붕 밑에서 번역하여 1954년에 나왔고, 1985년에 평민사에서 다시 내었다.

 내가 이 번역서를 대학시절에 읽고 느꼈던 감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젊은 열정과 순수성,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학문적 의욕이 이 책을 통하여 공명되는것 같아 무릎을 치며 읽었다. 그런데 차츰 공부가 깊어져 다른 정의론의 책들도 읽고 브룬너의 견해의 장단점도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법학자 한스 켈젠(HANS KELSEN)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신랄한 비판은 나를 두 절벽사이에서 고민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브룬너는 정의와 자연법의 절대적 존재를 확신하고 이론을 전개하는데 반해 켈젠은 상대주의 내지 법실증주의자로서 브룬너 이론의 「비과학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이다.

 나는 지금 어느 이론이 맞고 틀린다는것을 얘기하려는것이 아니고 정의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솔직히 말하여 정의는 켈젠처럼 논리적으로 실용적으로 분석되어지는 성질의것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신념적이고 의지적인 「절대성」같은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문민정부에서도 진정한 정의의 기틀위에서 개혁을 추구하는것 같긴 한데, 솔직히 정의의 에토스가 아직 피부에 와 닿도록 느껴지지 않는다. 적지않은 의문과 비판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는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시사적」 뉘앙스만이 아니라 나는 나이가 들어 법학자로서 정의에 관한 전문가 같이 되어 이런 저런 이론들을 읽으면서도 그럴수록 학생시절에 읽은 브룬너의 책을 더욱 강하게 상기하게 된다. 정의는 결코 자기가 선 이익의 관점에서 주장하는것이 아니고 무언가 보편적인 공동선(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서 찾으려는 근본방향, 정의는 사랑의 계산(CALCULATION OF LOVE)으로서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기 위하여는 정의라는 통화로 해야한다는 설명은 새삼 새롭게 들린다. 윤리는 강조되면서도 정의가 느껴지지 않는 지금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개혁이 좌절될 수는 없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음미하며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한국교회가 그의 정의론을 얼마나 소화하고 실천하려 했는지, 기독교뿐 아니라 한국 종교계, 사법부 모두 정의의 요청에 겸손해야할 책으로 다가온다.<최종고·서울대 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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