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소설의 언어가 긴장과 탄력을 잃고 있다. 말이 함부로 소비되고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며, 고전소설에 방불한 흥미위주의 사건과 영웅성이 남용되고 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우리 소설가들 역시 이제 스스로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가 되려는 희망도, 고뇌하는 장인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노력도 모두 잃어버린 것일까? 그리고 기꺼이, 아니면 어쩔수 없이, 한갓 상품의 생산자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일까?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이 선물가게 혹은 대중문화의 전시장으로 바뀌어 가는 우리의 사회현실이 소설가들을 그렇게 강제할수록 소설가의 진정한 임무는 보이지 않는 그 힘과의 처절한 싸움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 간행된 채영주의, 기왕의 그의 소설들과는 상당히 다른, 「크레파스」라는 장편소설은 필자로 하여금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부정적 경향이 얼마 남지 않은 진지한 소설가들에게까지 스며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잡한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지금까지 본격소설만을 써온 채영주가 내놓은 이 소설은, 작가서문에서 표명한 그의 사적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의 세대들이 걷고 있는 상업화의 징후를 짙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말해 「삶의 체적을 부풀리고 싶다는 욕망」, 소설 이전의 원초적 에너지에 대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같은 사적인 욕망을 떠나서 독자들에게 대중영화의 원작처럼 읽힐 우려가 있다. 별다른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언어, 더 이상 반성적 사고가 필요없는, 그러면서, 영화의 화면처럼 숨가쁘게 바뀌는 장면의 전환, 주인공 유진의 영웅적인 행동과 그에 따른 해피엔딩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이런 요소들이 바로 그렇게 만들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필자는 권성우가 이 소설집의 해설 첫머리에서 말하는 『의도적으로, 혹은 전술적으로 가벼워지고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개인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채영주가 지금까지 보여준 소설들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가진 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소설세계와 소설쓰기에 대한 모색으로 이해를 하지만 공식적인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상업주의와의 위험한 협상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또 필자는 이 소설이 상당한 시사성을 지니고 있는 『한국인과 흑인, 흑인과 백인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소설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수있지만 권성우의 말처럼 그것을 『본격적으로 해부한 소설』이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인종간의 갈등에 수반된 논리와 심리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천착하기보다는 그것이 야기하는 범죄와 폭력의 열거,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 유진의 영웅적 행위에 너무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소설에 삽화처럼 삽입된, 그러나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인, 버스 안에서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내팽개치는 이야기가 어떤 무의식적 편견과 반이성적 심리로부터 유발되는 것인지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되어야만 했다.
채영주의 이번 소설에 대한 필자의 이같은 우려가 아무쪼록 기우이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의 그레엄 그린에게 있어서의 대중소설적인(탐정소설적인) 수법의 실험과 같은 의미있는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문학 평론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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