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가 펴낸 「한국전쟁일지」의 1952년 4월1일의 전투상황은 짧다. ▲지상전투 탐색전만 전개 ▲판문점 남쪽 문산 서쪽 유엔군진지에 대한 중공군 2개대대의 야간공격 격퇴 ▲F 86 세이버제트기편대 북한상공에서 전개된 공중전에서 MIG기 10대 격추, 13대격파 ▲스탈린, 미국 신문편집자 서면 질의에 회답등이다. 이날짜 「로동신문」사설은 『수령에게 드리는 인민들의 경애심이다』수령이 만40세가 되는 4월15일의 전황과 사설은 어떤것일까.
전황은 ▲유엔군 전차부대 금성 남서쪽 공산군 진지공격 ▲문산 서쪽및 북쪽에서 유엔군진지에 대해 공산군, 4차에 걸쳐 야간공격 ▲유엔 공군기 진남포 공격 ▲유엔해군함대 제17기동부대 함흥, 원산, 양덕 3각지대 철도목표 공격 ▲한·미회담 중앙청에서 개최 등이다.
수령이 불혹의 40세를 맞는날 「로동신문」에는 「김일성 동지는 조선인민의 수령」이란 박정애(1907년∼86년이후 생사불명)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상무위원의 칭송기사가 실려있다.
불혹이란 말은 북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조선말 대사전」에는 ○표가 붙어있다. 지난날에 쓰이던 한자말이나 한문투의 말이라는 표시다. 해의는 「(무엇에) 홀리거나해서 갈팡질팡하지 않는것」이다.
수령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도자는 해석하고 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리해관계를 분석종합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동의어는 영수이며 사용빈도수(1백4만여단어중 두번이상 사용하는)에서는 1백25위(1천1백15단어중)며 1백4만여 단어중 8백90번이나 쓰이고 있다.
어찌됐든 「로동신문」에서는 수령은 불혹의 나이에 그 위치를 차지했다. 갈팡질팡하지 않는 나이에 수령이란 칭호를 얻게된 그는 정말 불혹같이 그후 41년을 살았을까.
특사교환을 거부한 지난 4일까지 그는 흡수통일은 안되고 속마음은 적화통일을 염원하고, 그 방법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아들에게 유일지도체제인 수령직을 승계키위해 「연미배한」에 홀려서 고집, 생떼를 쓰는 갈팡질팡의 세월을 보내고있다.
김일성은 그럼 언제부터 수령이란 칭호를 갖게되었는가. 성균관대학에서 「조선노동당의 지도사상과 구조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종석에 의하면 48년 조선인민출판사가 낸 「조선인민군」에 그때 인민군 총사령이었던 최용건이 인민군 창설일인 그해 2월8일 연설 말미에서 『「위대한 수령」김일성장군만세』라고 부른것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후 두번째가 정전을 앞둔 소강전투속에 불혹을 맞은 그는 「로동신문」에 수령으로 공식 등장한다. 이어 북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박사 김한길의 「현대조선력사」에는 52년5월23일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던 6천2백23명의 포로들이 보낸 탄원서에서 『우리의 사상과 의식은 항상 조국과 수령 김일성장군과 함께 있습니다』고 수령칭호를 썼다고 적고있다.(「남과북」91년6월4일자)
이종석박사에 의하면 40세 수령에게 바친 칭호는 흐루시초프 소련수상의 스탈린 개인숭배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사용빈도가 줄어들었다는 것. 그러나 유일지도체제가 확립된 67년부터 수령이란 칭호는 신문·방송·연설문들에서 공식화된다.(「남과북」93년10월18일자)
어떻든 수령의 칭호가 인민군 용어에서 인민에게 알려진것은 수령이 40세가 되는 불혹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수령은 휴전으로 전쟁을 끝마치면서 승리라고 주장했다. 중·소분쟁 와중에는 중국에 붙었다가 68년에는 소련에 붙는등 갈팡질팡하면서 주체를 내세웠다.
꼭 한가지 흔들림이 없는것은 있다. 수령이란 칭호를 계속 가지고, 그 칭호를 「원쑤」인 미국·일본과 타협해서라도 아들에게 승계시키겠다는 것이다.
아직도, 80세가 넘는 지금에도 갈팡질팡은 남아 있다. 어떤때는 핵이 없다고 했다가 어느날에는 있는것처럼 위협언사를 쓰는 것이다.
휴전을 해야만하는 전황속에서 40세가 되어 훔쳐온 수령이란 칭호에서 그 갈팡질팡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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