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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7번 정복 김응룡 해태감독(월요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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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7번 정복 김응룡 해태감독(월요초대석)

입력
1993.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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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전까지는 뛰어야죠”/경기중 무뚝뚝 작전중 하나/초조 불안감 사탕·독서로 풀어/「최선후 승복」외 승리비결 없어 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다. 일선에서 뛰는 선수뿐 아니라 프로야구감독들도 대중스타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지난달 26일 해태를 일곱번째 한국시리즈정상에 올려놓은 김응롱감독(52). 82년10월 해태감독으로 부임한후 7번 한국시리즈에 나가 팀을 모두 우승시킨 한국프로야구 제1의 명장이다. 6척이 넘는 키, 1백㎏에 육박하는 거구는 사람을 압도한다. 말이 없고 무뚝뚝한 표정은 포커 페이스로 타고난 승부사기질을 물씬 풍긴다.

 그러나 그를 사석에서 만나보면 이런 이미지는 단숨에 사라진다. 순진무구한 웃음, 투박한 말투, 시골사람같은 소탈한 행동. 알고보면 그도 부드러운 남자인 셈이다.

 가고픈 고향에 살아있을 지도 모를 생모와 생이별한 이산가족의 아픔, 한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프로야구감독 11년동안 절친한 친구들이 모두 곁을 떠나버린 상처뿐인 영광. 그래서 혼자서만 십어야 하는 사무친 고독.

 지난달 26일 우승이 확정된 순간, 내리쬐는 강렬한 카메라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이 명장의 얼굴이었다면 조명에 반사된 그림자는 평범한 한 인간의 그림자였다.

 ―우승을 축하드리고 해태가 프로야구 정상에 일곱번이나 올랐는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스포츠에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하면 되는 것이지요. 다 선수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입니다(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이다). 사실 올해 만큼 힘들게 우승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팀의 전력이 예전만 못해서 어려운 경기가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11년이라는 적지않은 세월을 프로야구 감독을 하고 계시는데 감독직은 할만한 직업입니까.

 ▲감독들은 허황된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독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사기꾼(?)인셈이죠. 상황마다 상대팀을 속여야하니까요. 경기시작전에는 승패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경기직전에 가장 애가 탑니다. 야구감독이라는 것이 잘하면 부와 명예가 함께 하지만 못하면 순식간에 사표를 내야하는 불안정한 직업입니다. 프로야구 출범이후 12년동안 수많은 감독(72명)이 거쳐갔지만 어느 감독치고 안주머니에 사표를 안가지고 다닌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역선수시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수명이 짧은 사람이 프로야구감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경기중에는 초조감 때문에 항상 사탕을 입에 물고 삽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제 주위에 보면 사탕껍질이 수도 없이 깔려있어요. 처음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하죠.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된다면 솔직히 감독 말고 다른 일을 해보겠습니다.

 ―항상 말이 없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는걸로 알고 있는데 천성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경기중에는 작전상 더욱 무뚝뚝할 때가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사생활에서 손해를 볼 때도 많고요. 감독이 순간마다 일희일비하면 경기를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도 사람인데 기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중에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칠까봐 절대 내색을 안합니다. 그리고 야구는 3할 게임이라고 말하듯이 열번중에 세번만 잘하면 되니까 한번 잘했다거나 한번 잘못했다고 해서 선수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그랬듯이 어필을 하면 심하게 할 때가 있는데 뒤에 숨겨진 의도는 없습니까.

 ▲어필도 작전의 일종입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심한 어필을 한것은 여기에서 다 밝힐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선수들에게 가끔씩 제가 화났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하는데 한국시리즈때 심한 어필을 한것도 우리팀선수들에게 정신적 긴장감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감독직은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프로야구감독이라는게 수명이 긴 직업은 아닙니다. 제 희망이지만 환갑전까지는 감독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항상 스트레스의 연속일텐데 어떻게 해소합니까.

 ▲감독을 하다보면 항상 불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습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읽습니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죠. 예전에는 테니스도 하고 등산도 했지만 요즘은 거의 못합니다. 또 일주일에 한번씩 송광사 근처 과수원에 계시는 아버지(김식영·82)를 찾아뵙는 게 제게는 큰힘이 됩니다. 거기에서 풀도 뽑고 나무들도 돌보고 하면서 아버지와 얘기하다 보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어쩌면 제게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르죠.

 ―말씀하신것처럼 효자이기도 하지만 애처가다 공처가다 라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가족이야기 좀 해 주시죠.

 ▲항상 미안한 부분입니다. 아내나 아이들한테 제대로 가장노릇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72년 당시 서울 미대를 졸업한 집사람(최은원·52)을 친구소개로 만나 6개월을 쫓아다녀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주고 있어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딸만 둘인데 큰아이(혜성·20)는 뉴욕 플랫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고 작은 아이(인성·18)는 줄리어드음대 예비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1년에 약 두달정도 같이 생활할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떨어져 있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야구와 언제 인연을 맺었습니까.

 ▲9세이던 1·4후퇴때 평양에서 걸어서 반나절이나 떨어진 고향에서 아버지와 큰누나(옥희·74년 작고)손을 잡고 잠시만 피란한다는게 가족과 생이별이 되었습니다. 그후 부산에 정착했고 개성중1년때 교내 학급대항야구대회서 두각을 나타내자 야구부선배들이 눈여겨 뒀다가 야구부입단을 권유한게 첫인연입니다. 그후 부산상고를 거쳤고 한일은행에서 선수와 감독을 하면서 제5회 아시아선수권 4관왕에 오르기도 했죠. 81년 미국 조지아주 서든 칼리지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와서 프로에 들어갔습니다. 아마시절엔 한때 저도 연습생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집근처 장충단에 헌타이어를 매달아 놓고 밤늦도록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당장 내년에 또다시 우승에 도전 하는게 당면목표입니다. 그리고 프로야구감독을 그만둔후에는 꿈나무들을 지도해 보고 싶어요. 제가 감독을 시작한후 한번도 어린선수들을 가르쳐 본적이 없습니다. 또 프로야구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기본기등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인터뷰=체육부 정연석기자>

▷약력◁

▲41년 평남 평원 출생

▲부산상고(60년)∼우석대(65년) 졸업

▲64∼81년 한일은행 선수·감독

▲77∼80년 국가대표 감독

▲82∼해태타이거즈 감독

▲국민훈장 석류장, 체육훈장 백마 장, 83·86∼89·91·93년 프로야구 최우수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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