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 처음가르치는 “모범의 글”/미래지향적인 교육이념 반영돼야 1937년 신학기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교육용「조선어독본 권1」의 제1과 제목은「소」다. 소는 주인에게 순종해 묵묵히 일하는 동물이다. 소를 조선인의 상징으로 제시해 일제가 시키는대로 저항없이 따르는 황국신민들 양성하려는 의도가 조선인들의 언어교과서 맨 앞장부터 반영됐던 것이다.
소에 이어 2과에 등장하는 것은 소나무와 버드나무. 소나무는 본디 우리 민족에게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소나무는 등이 굽고 뒤틀린 모습으로 묘사돼 함께 나온 버드나무처럼 바람부는대로 나부끼는 변절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초등교육의 첫 과정부터 조선인의식을 탈색시키려는 일제 언어교육의 실상을 엿보게 한다.
조선인의 긍지를 말살하고 민족성마저 변질·비하시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내선일체를 내세워 우리의 언어를 말살하고 아예 조선어교육 자체를 없애버리고 말았었다.
어느 시대이든 국어교과서의 첫 문장은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교육이념을 농축·반영한다. 한 사회가 교육을 통해 어떤 인간상을 길러내려 하는가는 첫 문장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체로 알 수 있다. 첫 문장은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쳐주는 매개를 넘어 교육의 지향점을 밝혀주는 선언과 다름없다. 광복직후인 1945년 11월 군정청 학무국이 발행한「한글 첫걸음」제1과 「바다, 나라, 가자」는 「가자, 다 가자. 나가자, 다 나가자」라는 문장으로 시작돼 새로운 나라를 지향하는 진취성과 민족부흥의지를 고취하고 있다.
50년대의 전후 과도기를 지난 63년부터는「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이리 오너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순이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로 바뀌어 무이념(무리념)에 가까운 가족중심의 평온한 일상모습을 담고 있다.
73년 유신이후에는 「우리」라는 제목아래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첫 문장이다. 배움에 입문한 어린이들에게 국가의식, 집단의식부터 심어주려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엿보인다.
전쟁직후의 4학년 교과서에는 맨 처음 시 두편이 실려 있고 다음에 「우리를 돕는 유엔」「부상군인 위문」이 나오며 70년대에는 유신을 직접 홍보하는 글이 교과서에 실리는등 국어교과서의 첫 문장 이외에도 곳곳에 시대상황을 엿보게 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의 첫 문장은「나 너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기 우리 아기. 아버지 어머니 나 아기 우리 가족」으로 돼있다. 유신의 교과서지배에서 다시 벗어나 가족중심으로 복귀하면서도 민주주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0년대와 달리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나오는 것도 특이하다.
해방이후 교과서 편찬과정에서는 어느 시대이든 공식적인 교육과정상의 지침 이외에도 상부에서 『이런 내용을 집어넣으라』는 등의 주문과 간섭을 하는 일이 잦았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학교용 교과서는 모두 교육부가 저작권을 가진 1종교과서(전에는 국정교과서라고 불렀음)이지만 국어교과서는 87년부터 적용된 현행 제5차 교육과정부터 혁신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종전까지의 국어교육은 읽기에 치우친데다 수업시간에도 언어지식위주로 진행됐다. 그러나 5차 과정부터 언어사용기능 신장에 중점을 두어 정확한 표기와 발음, 어휘력 증대를 위한 학습활동을 강조하며 표현과 이해과정에서의 문제 해결력 및 창의력 사고력 신장을 위한 학습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국민학교에서「국어」라는 교과서는 없어지고 「읽기」「쓰기」「말하기·듣기」의 세 권으로 나뉘어 영역별 지도가 행해지고 있다.
국어교과서의 변화가 분책(분책)에 그치지는 않는다. 새 교과서는 어린이들의 생각과 이 생각들을 표현하는 어린이들의 언어를 가장 중요한 학습자료로 삼고 있다. 교과서의 글은 모범글이며 진리만을 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교과서관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어린이들의 글이나 미완성의 글도 싣고 있다.
60년대이후 꾸준히 실린「토끼와 거북이」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과거와 달리 경주에서 토끼가 거북이를 앞서 달리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다음 물음을 생각하며 토끼와 거북이를 읽어봅시다」라는 글과 함께 문항이 제시된다. 이어「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에서 거북이가 이기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거북이가 이기도록 이야기를 꾸며 봅시다」라는 제안이 나온다. 어린이들의 사고를 통해 글을 완성하도록 한 것이다.
국어교과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교과서는 고급 미색지에 판형도 학년과 과목에 따라 4·6배판으로 키웠고 삽화를 더욱 늘리고 만화까지 집어넣었다. 또 교과서가 학습장의 역할을 하도록 꾸며진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들이 보인다. 초등국어연구회 윤영일회장(서울 서원국 교장)은『언어기능 신장을 강조하고 있으나 학문중심 교육과정으로 인해 이해력이 아직도 중시되고 있다』며 표현력 증대에 더 노력할 것을 바랐다.
교과서 편찬과정의 개선도 필요하다. 5차 교육과정용 교과서는 교육개발원에 의뢰해 제작됐지만 교과서를 위한 독립기관이 설치된 외국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경우 연구 1년, 집필 1년, 실험 1년의 과정을 거쳤으나 외국에서는 별도기간이 따로 없이 연구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1종 단일교과서가 아닌 다양한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제안도 있다.
이제 95년이후에는 새로운 교과서가 사용된다. 새 교과서의 첫 문장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교육부 장학편수실의 정준섭연구관은 현재의 「나 너 우리 우리가족」이 개인의 자아발달과 공동체의식을 심어주어 함께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내용이라고 풀이하고 『새 교과서는 아직 논의단계이긴 하나 함께 사는 사회의 이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 6차 교육과정때도 이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어린이들의 공동체의식이 충분히 함양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의 어린이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 성장해야 할 세대이며 국내적으로는 통일시대를 주도해 나가야 할 새로운 국민들이다.
세계화와 통일시대를 맞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문장을 맨 처음 제시할 것인가를 우리는 이제 더 진지하고 깊이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첫 문장의 인상은 평생을 간다. 첫 문장은 교육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서울교대부국 김용한교사/국어교육과제/표현력·사고력 역점… 살아있는 언어능력 심어줘야
『학생들은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수를 중시하는 부모들의 성화로 아이들이 교과서의 글에만 집착해 교과서에 담긴 지혜를 익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교직생활 20여년의 김용한교사(46·사진·서울교대부국)는 교과서를 성전인양 떠받드는 그릇된 풍토가 올바른 국어교육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교과서는 전면 컬러인쇄에 지질도 좋고 판형도 4·6배판으로 키워 외형상 크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국어교과서는 세 권으로 나뉘어 내용상으로도 눈에 뛰게 개선됐습니다. 교과서 개선에 걸맞게 교과서에 대한 학부모, 아이들의 인식이 바뀌어 교과서가 제대로 활용돼야 합니다』
김교사는 또 어린이들의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해서 가정과 사회가 더 많은 배려를 기울여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국어교육은 다른 어느 과목보다도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이 크며 학교가 언어사용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가정과 사회는 배운 것을 익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잘못된 언어사용은 바로잡아야 제대로 된 국어교육이 완결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어교육의 출발점인 학교의 현실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무엇보다 지식위주의 주입식 수업으로 국어점수 따기만 가르쳤을뿐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언어능력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입시를 위한 국어교육이 행해져온 것이지요』
김교사는 다행히 5차 교육과정 개정으로 교육목표가 정상화되고 올들어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향으로 부모들도 책읽기와 표현력, 사고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돼 국어교육의 제자리찾기가 빨라지고 있다고 반가워한다.
『다만 TV등 대중매체의 언어순화가 미흡합니다. 출연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쓰는 말을 아이들이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을 명심해 신중을 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등장인물/교과서의 어린이들 이름… 친근감이 첫째 조건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교과서 편찬과정에서 의외로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 등장인물 이름짓기이다.
교과서의 맨앞에 등장하는 어린이의 이름은 곧 우리나라 모든 어린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므로 더욱 신중히 다루게 된다. 기성세대에게 철수와 영이가 가장 친근한 것도 1학년1학기 국어교과서의 첫 머리에 나오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철수와 영이는 1948년 문교부가 펴낸 1학년1학기 국어교과서의 맨 첫 인물로 등장해 바둑이를 귀여워해주는 같은 반 친구이자 이웃이며 새 나라를 이끌어갈 밝고 씩씩한 어린이이다. 이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와 달리 책이름부터 「바둑이와 철수」로 되어 있어 철수와 영이라는 이름을 어린이이름의 「대표」로 만들었다.
교과서 첫 등장인물의 이름은 이후 교과서 개편에 따라 바뀌어왔다. 60년대의 2차 교육과정에서는 순이가, 70년대의 3차에서는 이기영 김순이가, 그리고 지금은 미영이 영수가 각각 맨 먼저 나온다. 철수와 영이는 첫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는 영예는 빼앗겼지만 중간 중간에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름짓기에서는 그 시대 아이들에게 많이 불리어지는 친근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널리 보급된 한글이름이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2학년1학기 교과서에 나래가, 4학년1학기에는 슬기가 어린이들의 국어수업시간에 찾아간다. 6차 교육과정에서는 더 많은 한글이름 어린이가 교과서의 주인공이 될 전망이다.
한편 철수,영이와 함께 등장하는 바둑이는 교과서 편찬당시 미군정을 거쳐온 특수상황 아래서 미국의 「Come Come Spot」(바둑아 이리 오너라)라는 교과서를 모방해 집어넣은 사실상 미국산 수입바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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