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소설들은 정치적인 테마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들이면서 점차 두 가지 경향으로 경사해 가고 있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역사소설화와 사소설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하여 전자는 상업주의에 물든 작가와 출판사들이 역사를 흥미위주의 소재로 전락시키면서 한국인들의 심성에 깃들인 샤머니즘적인 세계인식을 부추기는 경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후자는 더이상 거대한 사회·역사적 진실에 집착할 모티프를 상실한 작가들이 마지막 남은 개인적 진실의 세계에서나마 정직성을 지켜보려는 몸부림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우리 소설들의 이같은 경향이 좀 더 심화된다면 90년대는 아마도 통속소설과 예술소설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송기원, 김인숙, 김영현, 정지아등이 근래에 발표한 작품들에서 보여준 「개인화되는 역사」혹은 「서정화되는 역사」라는 현상에 주목했으며, 최윤의 「문경새재」 또한 같은 맥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윤의 「문경새재」는 짧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배중인 한 남자와 그 남자를 도피시켜주는 한 여자, 그리고 수배자를 잡아야 하는 순경―. 이 세사람이 한밤중에 함께 문경새재를 넘었던 짧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짧은 여행은 세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짧았던 여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여행이 있기 전과 후의 세 사람 삶이 모두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여행은 『여행이 끝나고 나서 자신이 더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여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났을 때 수배자와 조력자는 부부가 되었고, 순경은 직장을 잃었다. 그들은 짧은 여행을 통해 함께 비밀을 공유하는 「인생의 공모자」가 되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박순경은 그 비밀을 「한밤중에 비밀을 가지고 문경새재를 같이 넘게 되면』 『비밀이 상대편에게 스며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최윤의 이같은 「문경새재」를 읽으면서 커다란 추상적 진실, 역사적 진실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구체적 진실, 체험적 진실의 의미를 가늠해 본다. 문경새재라는 공간이 세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습과 의무를 벗어나서 알몸으로 서로 앞에 서게 만든 곳이라면, 문경새재는 아마도 실재하는 특정공간이라는 의미보다 한 인간 앞에 또다른 인간이 가식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계기라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이런 가식없는 인간의 개인적 진실이 가지는 무게는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이를테면 수배자를 잡아야하는 순경의 의무를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사회적 의무나 관습보다 중요한 것일까? 점점 불투명해지는 역사적 진실의 무게 앞에서 최근 소설가들이 하는 고민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들이 자기고백적인 방식으로 사소설화되는 경향을 띠는 것도 이같은 문제의식의 소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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