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버린 40년 마음고생/달라진 한국서 위안받아”/부모 못모신 한 가장 커/당시 중립국행 이념보다 현실갈등 때문 지난 13일 입국한 제3국행 한국전쟁포로 출신 정주원씨(61·아르헨티나거주·외항선선장)는 직접 확인한 달라진 한국의 모습에 『조국을 스스로 버렸다는 40년간의 강박관념과 빨갱이·반동콤플렉스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것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중립국행 포로들은 대부분 현실적인 이유에서 어렵게 결심했을 겁니다. 사상갈등을 치열하게 인식하거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장래를 면밀하게 헤아릴 만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방황한 사람들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빨갱이 아니면 반동으로 몰아버리던 풍토에서 독재체제의 고향 북한,연고도 없고 북한군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아야 하는 폐허의 남한 어디에도 남고싶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정씨는 많은것들이 잊혀졌으며 종전후 제3의 선택을 하게 된 이유, 당시 상황등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한국전쟁이 약소민족을 마르모트로 삼아 전개된 강대국간의 경제·무기산업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진저리쳐지는 압박의 기억을 되살리는 거제포로수용소를 15일 둘러보며 「살아 다시 돌아왔다」는 미묘한 감정 사이에서 얼굴이 일그러졌던 정씨, 그는 전쟁에 끌려나올 때 명문 평양제1고급중학교 3학년생으로 김일성대학 진학을 앞둔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평양시내 기림리출신으로 5남매의 장남인 정씨는 아버지가 평남도청 보건소직원이어서 안정되고 다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징집 당시 어머니가 해산을 앞두고 있어서 동생이 1명 더 있는지 모르겠다고 궁금해 했다).
『공부만 하기도 싫어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했었지요. 얼떨결에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다 정치보위부에 잡혀 2개월간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는 거제포로수용소의 포로시절은 물론 아르헨티나에서 선원이 된 뒤에도 이러다가는 죽는다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매를 맞았다. 포탄속에서 살아났으나 사람의 손에 맞아 죽을 뻔했던것이다.
50년 7월30일 입대해 8월14일 서울에서 북괴군 소위로 임관, 제1군단직속 포병98연대 소대장으로 왜관까지 내려간뒤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 패잔병이 돼 후퇴하던중 10월2일 강원도 홍천부근에서 국군에 포로가 됐다.
학교에서 머릿속으로 익힌 자본주의 공산주의 유물론 유심론을 넘어 무자비하게 강요되는 미소 강대국의 논리와 약소민족의 설움을 죽고 죽이는 동족과 왜 와있는지도 모르는 외국군인을 통해 전장에서 체험했다고 한다.
『눈앞에 열려 있는 소총구멍이 대포구멍만큼이나 크게 보이더군요』
사병출신은 그나마 봐줄 것같아 끝까지 우겨 결국 사병포로가 돼 춘천 서울 인천 부산 수용소를 거쳐 51년초 거제78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년쯤 지나니 포로들 사이에 좌우익 대립이 생겨 분위기가 더러워졌어요. 78수용소도 1·2·3대대는 반공, 4·5대대는 친공세력이었죠. 그즈음에는 하루하루가 불안했어요. 아침마다 수용소 정문에 반공포로시체가 쌓였으니까요. 미군들에게 한국인 포로의 목숨은 그다지 중요한 관리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를 감싸고 있는 독봉산에 인공기가 걸리고 헬기가 이를 철거해 착륙하기도 전에 다시 또 인공기가 되걸렸다고 한다.
정씨는 많은 반공포로들처럼 왼쪽어깨에다 멸공이라고 문신을 새길 만큼 반공세력에 동화된 면도 있었으나 결국 종전후 제3국행을 결심했다.
『수용소에서 지나가는 말로「제3국이나 갈까」라고 했다가 정말 맞아 죽을 뻔했어요. 이런 게 어디있나 싶어 자유로운 곳에 가기로 했습니다. 인종차별이 없을것같은 멕시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제3국으로 간다고 나를 두들겨댔던 그 사람을 판문점 중립국수용소에서 만났어요. 그 역시 인도행 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인도 델리의 수용시설에서 유엔지원으로 장씨는 영어 양계 사진공부를 했고 용돈도 나와 피서와 운동도 즐기며 비교적 여유있게 생활했지만 정착하지 못했다는 불안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늘 편치 못했다.
멕시코행이 불가능해진후 57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다. 서울대공대 출신선배와 함께 무턱대고 찾아간 사진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직장을 얻으며 빠른 속도로 정착해나갔다. 그러나 요즘처럼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해 한국소식을 제때 전해 듣지 못해 답답했고 북한의 잦은 접촉시도가 그를 괴롭혔다.
인종차별이 없는 곳인 덕분에 쉽게 현지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룬 뒤 좀 더 적극적으로 일할 생각으로 58년부터 벌이가 좋은 원양어선을 탔다. 남대서양을 누벼 고기를 잡고 유조선도 타는등 거친 파도와 싸워나가면서도 독학에 열중, 1년만에 갑판장이 된 정씨는 이주 14년만인 71년 자격시험을 통해 선장면허를 땄다.
72년과 80년대 중반 사업차 두번 남한을 찾았으나 하나도 바뀌지 않은 적대적 분단상태와 독재체제에 실망만 하고 돌아갔다. 반가움보다는 분단국의 피해가 먼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두번에 걸쳐 사업을 시도했다가 망했으나 끈질기게 재기, 이제 5백톤급 원양어선의 고용선장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다섯 손주의 할아버지가 됐다.거제수용소를 찾았을 때 자기와 꼭 닮은 기록사진속의 포로를 보면서 정씨는『조국은 이제 자랑스럽게 발전하고 있지만 부모를 모실 수 없는 내 인생은 실패작입니다』라고 말했다.【김병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