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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의 여유/손숙 연극배우(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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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의 여유/손숙 연극배우(1000자 춘추)

입력
1993.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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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썩 괜찮은 영화를 한편 봤다. 여자의 운명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피아노」라는 영화였다. 사실 방송과 강연, 원고 등에 쫓기듯 살다보니 영화나 연극을 마음 편히 앉아서 볼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자연히 감성이 메마르고 팍팍해져감을 잘 알면서도 짬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 곁에는 항상 해야 할 일이 잡다하게 많았던 것이다. 약간은 초조해져 있는 내게 「피아노」는 적지 않은 위로를 주었다.

 영화는 19세기 뉴질랜드의 원초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낮게 가라앉은 하늘, 굽이치는 파도, 그리고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백사장 위에 피아노가 한대 있다. 주인공인 벙어리 여인이 피아노를 치면 아버지가 불분명한 그녀의 딸이 피아노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장엄하면서도 음울한 바닷가에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벙어리 여인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다. 그녀를 데리러 온 낯선 남편은 이기적이었다. 무겁고, 살림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피아노는 바닷가에 버려둔 채 가구등의 세간살이들만 집으로 옮겼다.

 그녀에게 피아노를 되찾아준 건 사랑이었다.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 험상。게 생긴 이웃집 사내가 그녀의 침묵의 소리를 이해하고 피아노를 찾아준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움트고, 남편과의 불화의 골은 깊어만 간다. 결국 남편이 휘두른 서슬 퍼런 도끼날에 오른쪽 두번째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비극이 닥치지만 그녀는 끝내 사랑을 택한다.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남자와 새 삶을 찾아 떠나는 길에 바다에 버려지는 피아노….

 이 영화에서 벙어리 여인의 침묵은 여자의 굴레를, 피아노는 속박당하는 여성의 꿈을 상징한것이 아닐까. 그리고 새 삶을 찾아가는 길에 버려지는 피아노는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듯했다.

 강한 눈빛, 발레하는것같은 수화 동작을 보여준 홀리 헌터의 벙어리 여인역은 빼어났다. 같은 배우로서 탐나는 배역이었다. 그런 영화, 그런 배역이라면 혼신의 힘을 바쳐 연기해보고 싶었다.

 사랑할 일은 많은데 이 가을은 너무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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