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형기(「한국문학」 9,10월) 천양희(「작가세계」 가을) 두분의 근작들에 대해 치하하려 한다. 기름기와 군살이 모두 가신 이형기 시인의 풍자는 정갈하기까지 하며, 그의 정신은 회갑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랄하다.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 를 빌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청사포에서」) 천양희 시인은 어설픈 달관의 몸짓 따위를 쉬 용납하지않을 기세이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숨쉴 만한 것은 후미진 모퉁이 마다에서 외롭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깨어있는 이러한 예인들의 숨은 공덕에 힘입은 바 크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최승호의 「회저의 밤」과 이승하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 두 권의 시집은 읽는 사람을 숨막히게 한다. 문면에 드러나는 인간 세상의 참상과 그 참혹을 자신의 몫으로 앓아내는 두 시인의 고통의 무게가 우리를 괴롭게 한다.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최승호의 시는 모든 존재의 남과 죽음 사이, 온갖 변전과 애환의 본질이 부질없음이며 무상(무상)이며 허무라는 것을 엽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허무는 지난 네 권의 시집을 통해 고통의 바다에 대한 냉혹한 실사를 거친 것이어서, 더욱 차갑고 견실하며, 막막하고 끔찍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유형의 것은 재로 돌아갈 뿐이며 따라서 그는 근본 형상인 재의 자리쯤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데, 그때 세상의 온갖 풍경은 기괴하고 잔인한 것이다. 세상의 모습에 그가 다소의 연민을 표하는 경우에도, 권태스런 비정에 묻혀 구원의 가능성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이렇게 황무한 자리로 몰아간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재> 의 나날 다음은 무엇으로 시이며 삶인 것인가. 누구도 쉬 답할 수 없으리라. 재>
시인 이승하는 저 백주의 폭력들―학살과 강간과 고문, 무고한 피흘림과 아이들의 굶어죽음 앞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고 있다. 인간의 말로는 무어라고 형용해볼 길조차 없어 보이는 저 난폭하고 무자비한 광경의 사진을 시 앞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시인의 여린 감성은 시를 이루지 못한 채 다만 피흘린다. 저 잔혹 앞에서 무엇이 시일 수 있나. 이<시를 이루지 못함> 이야말로 시인의 순결함의 증거일 것이다. 70, 80년대의 진보적인 문학운동의 도덕적 근거가 바로 이 지점인데, 울음이 수습된 뒤 그의 시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절망의 힘으로/폭력을 행사한 이를 용서하겠다> (「폭력에 관하여」)는 대목, <기도드리지 말기를 다만 묵상하기를> (「이 아이의 눈동자 앞에서」)의 부분에서 한 단서가 엿보이지만, 그 길은 또다시 얼마나 멀고 고될 것인가. 종족의 죄악에 대한 희생과 대속을 숙명적 소임으로 하는 시인에게 있어, 하늘 아래 좋은 날은 없을 것이다. 모쪼록 기품을 잃지 않고 견뎌주기를, 그리하여 서둘러 고통과 구원에 대해 말할 것이 아니라 고통과 구원의 지극한 일부로서의 시를 이루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잔인한 말이다.(문학평론가) 기도드리지 말기를> 시를 이루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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