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을의 한복판, 옷자락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서늘하다. 단풍산과 황금들녘은 가을의 풍경을 한껏 드러낸다. 한적한 주택가에서 드문드문 마주치는 감나무들에는 가지마다 탐스럽게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국화의 은은한 향이 어느 곁에 스며들듯이 삶의 자그마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살포시 떠오른다. 어린시절, 동네 공터에서 같은 또래의 어깨동무들과 어울려서 딱지치기, 다방구, 팽이치기, 구슬치기, 땅뺏기등을 하며 놀던 추억이 아련하다. 그 시절의 떠들며 내던 왁자지껄한 소리가 마치 창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인양 귓가에 맴돈다. 언제 생각해도 자랄 때의 골목안 정경은 정겨웠다. 이 가을에, 일상의 어김없는 되풀이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던 골목길이 새삼스럽게 눈에 거슬린다. 길 한편에 늘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 흙이라고는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시멘트 포장길. 노는것이 불안해 보이는 아이들 몇몇. 뜨락은 이제 정원이 되어 돈이 있어야만 갖는 자기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가난해도 자연이 옆에 있어 마음이 넉넉할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아파트 단지라고 사정이 더 나을것도 없다. 이즈막 자투리땅마저 모두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산을 벗하면 산을 닮고 물을 벗하면 물을 닮게 마련이라고들 한다. 어디에서나 문명의 이기들과 늘상 같이 지내는 우리들은 무엇을 닮아가는지. 미국자리공이 토양오염의 지표이듯이 전국토의 주차장화를 문화생태계 파괴의 표징으로 여긴다면 지나친 기우인가. 도시를 자연과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생활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자라나는 세대들이 휴가철 콘도에서의 자연만을 회상하는것이 아니라 어린시절의 생활이 밴 정서로 자연을 회상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면 다음 시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심심상인할것이다. 『찬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하여/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문유찬 연세대교수>문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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