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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같은 고향」 유감/정달영(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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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같은 고향」 유감/정달영(화요칼럼)

입력
1993.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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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악」의 교통체증은 아니었던것 같다. 연휴 마지막 날 귀경 길은 뜻밖에도 소통이 쾌적하더라고 한다. 여느 휴일의 경우보다도 문제가 적었다는 보도다. 『휴일이 길어서 내왕이 분산된 때문』이라거나 『질서의식이 높아진것도 원인』이라는등의 분석을 듣게 된다. 추석 민족대이동의 뒤끝이 이런 정도였다는것은 미리부터 「사상 최악」을 각오했던 귀성객들로서는 우선 다행한 일이고, 또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모처럼 짧지않은 휴가를 즐기고 대도시의 생활터전으로 복귀하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 한결같이 가볍기만 했을것 같지는 않다. 길이 시원하게 뚫린것과는 달리, 두고 떠나온 고향의 영상들은 앞뒤가 꽉 막힌듯 흐리고 답답한것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타향 같은 고향」의 느낌은 객쩍은 감상이 결코 아니다.

 조상의 산소로 통하는 산길은 사라진지 오래다. 사람이 다니지를 않는데 길이 남아 있을 수 없다. 농촌의 땔감은 연탄에서 기름으로 바뀌고 있다. 시골의 노부모에게 효도하는 내용의 기름보일러 TV광고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한다.

 소달구지나 겨우 다니던 길은 새까만 광택을 내는 아스팔트로 포장돼 산골짜기 벽지까지 자동차가 속력을 낸다. 길이 이처럼 잘 뚫렸으니 자동차가 없을 수 없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자동차들이 멈춰 서 있다. 도시에 사는 가족과 자녀들이 경쟁적으로 몰고 온 승용차가 대부분이지만, 차를 보유한 농촌가구도 아주 드물지는 않은 모양이다.

 기름보일러 난방주택에 승용차가 있는 농촌 풍경. 이 얼마나 꿈같은 현실인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으로는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다. 무엇에겐가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야흐로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들녘을 걸어본다. 날아다니는 곤충을 보기 힘들다. 곤충이 보이지 않아설까, 조류도 참새 아닌 것은 드물다. 『제초제 살충제 아니면 농사를 못짓네. 퇴비 안한지 오래 됐지. 왜냐구? 어디 사람품이 있어야지』

 추억이 알알한 냇가로 나가본다. 반쯤 썩은 물이 거의 멈춰 섰다. 부영양화가 어떻고 할 계제가 못된다. 상류에 관개용 소규모댐을 막은 후로는 냇물에 물넘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내 눈엔 이 냇물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농로를 걸으면서 곳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에 마주친다. 막걸리 담는 플라스틱 용기, 소주병, 마시는 소화제병, 농약병, 고무장갑, 온갖 비닐봉지들이 지천이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다. 이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사람손이 모자라서 수확을 포기한 고추밭이 널려 있는것과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행동을 「노동력부족」과 연계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것일까. 냉해로 농사가 결딴나고 농약으로 농토가 죽어 생태계가 망가지고 냇물이 썩고 하는 문제보다 한결 더 심각한것은 바로 이같은 현상에 이르게된 집단적인 심리상태가 아닐까.

 내 나이또래로 농촌을 지키던 몇 사람은 요 몇해사이 『소주를 너무 먹어서』 간경화 증세로, 또는 농약중독으로 이승을 하직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돌아오는 농촌」이 누가 외친 헛소리인지는 몰라도, 이 농촌에 애착을 갖지 못하는 농민을 탓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농민이 농로에 쑤셔박힌 플라스틱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농촌에서 「개혁」을 말하는 정치는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공무원들이 행여 사정바람에 다칠라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서 개혁의 발걸음이 더디고 무거운것은 당연하다. 제아무리 부양책을 쓰고 현금을 쏟아 풀어도 경제인·상인들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 한 경기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국민과, 특히 농민과 공무원과 경제인들이 움직이도록 그들의 마음을 떼어주는 일이 급하다. 그들이 스스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농로에서 거둬내고, 공무원과 경제인들이 모두 제품에 신명을 내서 「개혁」에 동참하도록 이끌어내는 동기유발이 필요하다.

 「개혁」에는 9할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면서도 스스로는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이 기현상을 깨야한다. 스스로 주연이 되기보다 「관중」으로 남으려는 이 속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추석 연휴에 대통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 잘 돼간다』고 대답한 농민들과, 농가주택의 기름보일러와 승용차가 서있는 농촌풍경에 속아서는 안된다. 귀경길은 뜻밖에도 소통이 잘됐지만, 오랜만에 찾아가 목격한 고향은 앞뒤가 꽉 막혀 답답했을 뿐이다.【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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