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고발 시풍개척… 65년 군사정권 반대 절필<싼 술 몇 잔의 주정 속에선 아니다 아니다의 노래라도 하지만 맑은 생시의 속 깊은 슬픔은 어떻게 달래나 나는 취했다 명동에서 종로에서 이런 걱이> (「아니다의 주정」 중에서) 싼 술 몇 잔의>
가장 주목받는 시인에서 어느날 돌연히 붓을 꺾고 30년 가까이 은둔생활을 해 온 시인 신동문씨가 연휴 중인 9월 29일 타계했다. 그는 65년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이 실현되지 않자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곧바로 충북 단양으로 내려가 평범한 농부로 땅을 일구고 포도를 재배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왔다. 붓으로 시를 쓰는 대신「대지」위에 「땀과 사랑」으로 생활의 시쓰기를 선택한 셈이다.
그는 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풍선기」라는 긴 산문시가 당선됨으로써 전후시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서정시가 판을 치던 50년대의 시단에 혁명적인 시어를 도입하며 병영생활 체험을 시대상황에 대입한 새 기법은 우리 시사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4·19혁명세대의 시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 「비닐우산」 「아니다의 주정」 등을 발표해 참여시니,민중시니 하는 말이 나오기 전에 현실을 고발하고 시대를 풍자하는 시풍을 개척했다.
시단의 선두에서 강렬한 시를 쓰는 외에 그는 4·19 직후에는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며 창간된 종합 월간지「새벽」의 주간을 맡아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연재하기도 했고, 「사상계」의 편집장과「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본가와 단양의 포도농장을 오가며 글쓰기와는 관련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는 침술을 익혀 어려운 주변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기도 했으나, 지난해 6월 담도암으로 판명되어 인간으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투병해 왔다. 시집으로는 등단 직후에 낸 시집 「풍선과 제3포복」이 있다.<서사봉기자>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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