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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의 「국어」/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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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의 「국어」/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3.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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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국어의 한 과목을 배우고 나면 학생들이 그 과목을 다 외워야 집으로 보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조그만 섬마을이라 한반 학생이 몇명되지 않은 교실에서 먼저 외우는 차례로 하나씩 자리가 비어갔다. 그러다보면 으레 몇몇 학생은 해가 저물 때까지 남아 읽고 또 읽고 하며 끙끙대게 마련이었다. 마침내 한두 학생이 참다못해 울음보를 터뜨릴 즈음에서야 선생님은 남은 학생들의 손바닥에 매를 한대씩 때리고는 어두워진 밤길로 내보냈다.이 무서운 선생님의 덕택으로 나는 지금도 그때 국어 교과서의 몇몇 대목을 기억한다. 선녀 이야기의 한 과목은 짧은 동시로 시작된다.

「하얀 바닷가의 소나무 밭에 물결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후로 나는 이 동시를 생각할 적마다 늘 영겁을 영상한다. 언젠가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백만년이고 천만년이고의 뒤 기어이 인류가 점멸하고야말 날이 올 것이다. 그때,생물이란 생물은 다 죽고 세상에 아무것도 살아있는 것이 없을 그때,바닷가의 하얀모래밭에는 물결만 하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하리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물결 밖에 없으리라….

이렇게 어릴 때 외운 단순한 동시 하나가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상상의 세계를 영원의 끝에 닿게 했다.

그 국민학교 선생님은 왜 어린 학생들에게 밤늦도록까지 애써 국어과목을 외우게 했을까. 그 글속에 든 지식이나 교훈이나 이야기를 암기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글 자체의 저작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씹고 되씹고 하여 글의 단물을 빨아 삼기케 하는 것이다. 글의 음감과 맛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그 동시의 해조음을 나더러 지금까지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94학년도 1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지난 8월 있었고 오는 11월 2차 시험을 앞두고 있다. 서울대는 대학별 입시 본고사의 실험평가 모의고사를 지난 12일 실시했다. 수학능력시험은 올해가 처음이요 일부대학의 본고사도 14년만의 부활이어서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에 대전환을 가져올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에서 관심들이 높다.

이 시험과목들중 국어문제만 놓고 보자.

수학능력시험에서는 국어가 「언어능력」속에 포괄되어 있다. 언어영역은 국어과목뿐 아니라 모든 교과목을 통틀어서 대학 학습에 필요한 우리 말의 이해와 사용 능력을 측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지식위주의 단순암기식 문항을 없애고 종합적 사고능력을 평가하는데 초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원칙에 따라 1차 수학능력시험의 언어영역에는 암기를 요하는 문항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암기식의 무조건 배제라는 것이 문제다. 「암기위주의 주입식 학습」이 우리 교육방식의 병폐로 지탄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 말만 들으면 다들 기겁을 한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는 바로 이것을 탈피시키자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암기가 다 저주의 대상일 것인가.

언어능력시험은 글이나 말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표현의 능력을 측정한다. 특히 표현력을 위해서는 언어의 감각을 익히는 것이 먼저다. 언어는 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감각적인 것이다. 이 언어감각을 기르는 교육을 입시가 유도해야 한다. 언어감각의 훈련은 많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외워야 한다. 좋은 문장을 외우고 좋은 시를 외워야한다. 그것이 몸속에 녹아있어야 한다. 외국어를 가장 빨리 익히는 첩경은 무턱대고 문장을 암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언어감각이 쉽게 습득된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단순암기가 나쁘다는 것은 원리나 이치를 모르고 무조건 정답만 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문장이나 명시는 원리 이전의 것이다. 문법이나 문장구조를 따져서 가려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훌륭한 작품의 암기는 단편적인 지식의 주입과 전혀 별개다.

대학입시는 문장,특히 시의 암기도도 테스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뜻에서 고무적인 것은 이번 서울대의 실헙평가고사다. 「국어Ⅰ」의 문항중에는 박인로의 「누항사」를 지문으로 쓰면서 한 대목을 밑줄 쳐놓고 「이 내용과 비슷한 삶을 드러낸 고시조 작품 한편을 외워 쓰라」는 것이 있다. 주관식 출제라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이 국어의 「외워쓰기」는 대학입시 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 「국어Ⅰ」에는 황순원의 소설을 인용해놓고 중간의 한 대목을 비워둔뒤 이 빈칸에 들어갈 내용을 추리하여 8행정도 쓰라는 출제도 있다. 반드시 원문대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외우고 있어서 원문대로 써넣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정답은 없다.

수학능력시험도 본고사가 없는 많은 대학들을 고려해서라도 언어영역의 암기력 평가출제가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객관식 선다형 방식으로는 출제가 어렵다고 핑계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시 한편중에 한두구절을 비워놓고 그 구절을 여러 예문 가운데서 찾아내게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고교생들이 명시를 줄줄 외우고 명문장을 줄줄 외우게 된다면 이 이상 좋은 국어교육이 어디 있겠는가.<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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