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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이후/정운찬(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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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이후/정운찬(한국논단)

입력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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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나는 다방면에 걸친 경제개혁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에 대해서만은 그리 적극적이 아니었다.그 이유는 간단했다. 기업의 진입·퇴출의 자유허용,은행의 대출심사권 확보,토지공개념 등의 개혁적 처방이 자생적 경제성장의 기반확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 경영의 자율성 확립과 금리자유화와 같은 금융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실명제를 즉각 실시하라는 것은 예상되는 큰 부작용을 고려할 때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금융실명제는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의 경제생활뿐 아니라 도덕의식을 투명하게 만들어 정직한 사회의 기반을 이룰 것이 틀림없다. 또한 금융실명제의 실시는 대통령의 쓸데없는 선 경기회복 후 제도개혁의 입장을 포기하고 제도개혁을 경제운용의 우선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논리와 개혁의 순서를 무시하고 정치논리에 의해 추진된 금융실명제가 경제에 큰 주름살이 지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던져진 주사위

그러나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풀어야하는 최우선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실명제의 충격을 완화시키고 경제의 체질을 개선시켜 자생적인 성장기반을 이룰 수 있는가이다.

다행히도 증시의 폭락,사채시장의 붕괴에 따른 중소기업의 자금난,채권시장의 위축,일부 투신사에서의 자금인출사태 등 초기에 나타났던 충격적 현상이 극복됐거나 상딩히 진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거액의 「검은 돈」들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실명전환 시한인 10월12일 이후 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무자료로 거래해온 영세 및 중소기업,특히 유통업체의 도·소매상들은 거래양성화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 자금의 향방이 앞으로 금융실명제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같은 인식에서 출발하여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금융실명제의 충격을 완화한다는 명분을 내걸며 예금의 순인출액이 3천만원이 넘더라도 5천만원까지는 보고의무를 면제해줄 것과 가명계좌를 실명화할 때 그 금액이 5천만원이 넘더라도 1억원 이하면 국세청 통보와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검은 돈」의 산업자금화를 위해 정부가 장기저리 무기명 채권을 발행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초강성 실명제의 충격을 완화하자는 이들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정한 룰을 다시 바꾸면 실명제로 인한 불확실성이 더욱 증폭되고 또 다른 변화가 올 것이란 기대하에 자금흐름이 더욱 왜곡될 수 있다. 또한 정부 주도하의 무기명 채권발행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는 실명제의 취지에 정면으로 상치된다.

○정면돌파 바람직

나는 이 기회에 금리자유화를 포함하여 완전한 금융자율화를 즉각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정명돌파로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기관의 경영자들은 예를들면 예금시장에서 많은 노력과 연구를 통해 수신기반을 강화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큰손들과 손잡고 그들의 비밀을 유지해주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경영능력은 정치적 로비능력에 의해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혁신가적 기업가정신을 가진 경영주가 은행산업에서도 배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경영진의 선정에 어떠한 외압도 작용해서는 안된다.

이렇듯 금융시장의 체질개선이 이루어지면 금리는 이들의 분석과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이자율 상한이 기업의 금융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왔다. 그러나 이자율 상한은 꺾기나 커미션 등으로 실효성이 없었고 오히려 만성적인 자금의 초과수요를 초래해 은행이 선호하는 대기업은 득보고 중소기업은 손해보게 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시정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금리자유화는 위축될대로 위축된 공금융시장과 사금융시장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명제 때문에 움츠러든 깨끗한 돈과 「검은 돈」을 모두 양지로 끌어내는 인센티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리자유화가 금리의 자유방임은 아니다. 금리자유화시대에도 정책당국은 수신과 여신면에서 적정한 이자율 수준이 유지되도록 이자율의 추이를 주시하여 금리가 너무 오르면 내려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아직 우리 경제는 높은 여신금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화폐금융정책의 중간목표는 이자율을 위주로 하고 통화량은 보조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경제개혁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서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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