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탄압의 현장 찾아 행동하는 휴머니스트”/퍼스트 레이디역할 거부/불 정부엔 “반체제적 인사”14일 방한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이 시대의 진정한 「투사」 한명을 대동했다. 그는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프랑스정부의 공식 수행원은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정치와 외교에 비판적인 「반정부인사」이며 때로는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다니엘 미테랑. 그녀를 단순히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그녀는 「마담 미테랑」으로서의 전통적이고 의전적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아왔다. 아니 스스로 이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이 86년 창설한 인권구호단체인 「프랑스 리베르테(자유)」의 의장으로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며 더 잘 알려져 있다. 핍박받는 인권과 억눌린 자유,기본적인 생존권의 위기로부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 그녀의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부인의 우아함보다는 투사의 용기·소박함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미테랑여사는 행동하는 휴머니스트이다. 르 몽드지는 한때 미테랑여사를 「자유부인」이라고 불렀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탄압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누구의 간섭도 없이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그녀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말썽많은」 퍼스트 레이디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미테랑 대통령이 뮌헨의 서방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에 갔을 때 미테랑여사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난민촌을 방문했다. 그녀는 방문도중 폭탄차량에 의한 암살기도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 테러사건은 그녀의 쿠르드반군 난민지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후세인 정권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라크는 당시 그녀의 쿠르드족 방문을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비난했다.
지난 7월에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세르비아를 방문,밀로세비치 대통령을 만나 반체제 인사인 무크 드라스코비치 부부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그녀는 『나는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위엄을 찾도록 돕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프랑스 리베르테」의 창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아내는 인류의 불행한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도처에서 호소해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엘리제궁의 비서진만으로는 부족하다』
미테랑여사는 티베트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티베트의 민족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나는 등 소수민족과 박해받는 집단에 특히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사태후에는 투옥된 김대중씨의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밖에 칠레 등 독재국가에서의 인권활동,남아공의 흑백협상 주선,방글라데시,쿠르드 이재민 지원과 어린이 입양 등 인권과 자유가 침해받는 곳에는 어디든 찾아다녔다.
신념과 외교는 다르다. 국제사회에서 그녀의 행동은 당연히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만큼 관련국가는 물론 프랑스정부와도 많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대통령의 해외방문 때도 방문국의 인권상황을 고려,동반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인권이 국가이익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이런 그녀를 두고 『다니엘은 나보다 더 좌익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테랑여사는 이에 대해 『나는 사회주의자이고 프랑수아는 미테랑주의자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 신문이 보도한바 있다.
부부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처녀 다니엘은 17세에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20세인 44년 오빠의 친구이자 동료 레지스탕스인 미테랑과 만나 결혼했다.
미테랑이 81년 세번의 출마끝에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선거벽보를 직접 붙이는 등 정치인의 아내로서 내조했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제궁보다는 「프랑스 리베르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공식 의전행사에도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는다.
다니엘 미테랑여사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성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것은 그녀의 위엄과 품위,그리고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소박함 등보다는 행동하는 용기와 양심으로서일 것이다. 그녀는 엘리제궁을 떠난후 더욱 자유스러운 투사가 될지 모른다.<파리=한기봉특파원>파리=한기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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