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회관대극장에서 민중극단의 「상화와 상화」가 지난 9월9일부터 16일까지 공연되고 있다. 두 「상화」는 모두 시인 이상화의 아호다. 그의 문학세계와 삶의 고뇌를 그린 이 연극은 초기의 퇴폐적이고 낭만적이던 상화와 민족의 현실에 눈을 돌린 상화를 각각 다른 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한 시인의 내면적 갈등과 변모를 형상화했다.이 공연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올해가 이상화시인의 50주기라는 사실이다.
이상화라면 「나의 침실로」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명시가 온 국민의 애송시로 되어있는 낭민시인이자 민족저항시인이다. 그는 1920년대이래 식민지시대의 민족감정을 민족정서로 노래하다 광복을 못본채 1943년 43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의 「빼앗긴 들에도…」는 특히 그 마지막 구절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의 함분과 통한이 항일문학의 절창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런 민족시인의 50주기를 우리는 대부분 잊고 있었다. 지난 5월22일 고향인 대구의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시비 앞에서 추모제가 열리기는 했다. 이것은 예총대구시지회가 주최한 것이었고 현장에서의 시낭송과 강연으로 끝났다.
이날 추모제는 상화시비 건립 45주년의 기념을 겸한 것이었다. 1948년에 세워진 이 시비는 우리나라 문학비의 제1호다. 그만큼 광복후 맨먼저 생각났던 시인이 상화였다. 공원에 시비를 세우겠다고 했을때 당시의 대구시장은 『이것이 선례가 되어 너도나도 나서면 달성공원의 시비로 가득 차지않겠느냐』고 걱정아닌 걱정을 했다. 이때 건립을 주동한 김소운이 『제발 그렇게만 되었으면 오죽이나 좋겠소』하고 말했다고 한다.
상화의 50주기가 이렇게 적막한 것은 선례가 될까봐 두려워서인가. 어째서 상화가 일부 고향사람만의 상화인가.
상화의 유족으로는 차남 충희씨가 서울에 살고있다. 올해 60세로 상화가 숨을 거둘때 10세였다. 자식들에게 자상하고 정서교육을 시키려고 애쓴 아버지를 기억한다. 쓸쓸한 50주기가 안타깝지만 유족이 나설수도 없어 애만 태운다.
문화체육부는 달마나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해 기념하면서도 올해에 상화의 이름을 빠뜨렸다. 달성공원의 추모제에서는 시비 옆에 상화의 동상을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선뜻 앞장서는 사람이 없다. 대구시 교외의 경북 달성군 화원면 벌리에는 상화의 묘소가 있건만 우리의 마돈나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꽃다발이라도 갖다놓는 「나의 침실로」의 애송자가 하나도 안나타난다.
50주년은 단순한 반백년이 아니다. 한 시인을 새롭게 바라보는 거리의 단위가 된다. 재평하고 재발견할 기회다. 잊고 있었던 시인의 이름을 다시 불러볼 시간의 신호다. 그의 시를 재음미할 성대한 시제가 열려야 할것이다. 그의 생애를 총정리한 일대기가 전시도 되어야 할 것이다. 「가르마같은 논길」사이로 일찍 상화가 거닐던 「빼앗긴 들」은 지금 대구시 남구의 남문시장 일대에 걸친 시가지로 바뀌었다지만 이 거리서 「되찾은 들」의 축제가 한바탕 꽹과리를 울려도 좋다. 「상화와 상화」같은 연극이 전국을 순회해도 된다.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일제의 잔재를 허물기만 할 일이 아니다. 반일의 표상을 건설도 해야 한다. 한 개인의 친일행적을 뒤져 끌어내릴 생각을 하기 전에 항일의 기개를 모시고 치킬 생각부터 해야 한다.
우리 문학사에 민족시인이라면 이상화외에 이육사가 있고 윤동주가 있다. 둘 다 식민지하의 민족의 비운을 노래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했다. 이들 셋이 공교롭게도 광복직전 한해에 하나씩 40대미만의 나이로 타계하여 내년에는 이육사가,후내년에는 윤동주가 각각 50주기를 맞는다. 상화의 망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랑스 문학이 19세기말의 3대 상징파 시인으로 말라르메,베를렌,랭보를 자랑한다면 우리 문학은 식민지 말기의 3대 저항시인을 떳떳이 내세울 수 있다. 그 과시를 위한 대대적인 기념행사의 시리즈가 올해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민족시인으로는 한용운도 빠뜨릴 수 없다. 19세기 태생으로 위의 세사람과는 연배가 다르다고 근래에 기념사업이 비교적 눈에 띄는 편이지만 그도 내년이 50주기다.
시단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빈처」나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의 명편을 남긴 현진건 또한 올해로 50주기가 된다. 그는 상화와 동향이요 「백조」의 같은 동인이자 우연히도 같은해 같은날 별세했다. 이 빙허의 이름도 들먹여지지 않고 있다. 문단이고 시민이고 나라고간에 도대체 큰 문학인의 기념일을 챙기는 사람이 없다. 이효석만 해도 작년이 50주기였으나 유족 중심의 묘지참배만 하고 말았다.
짧은 우리의 근·현대문학사는 아직 1백주기의 시인이나 작가를 갖지 못한다. 50주기들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 우리 문학이 퇴비처럼 퇴적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50주기의 의미를 경시해서는 안된다.<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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