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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정화」 실패하면…/이성춘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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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정화」 실패하면…/이성춘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3.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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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민들은 고위공직자들에게 매우 가혹할 정도의 도덕적으로 엄격한 몸가짐을 요구하고 있다.미연방정부의 고위공직자는 행정부의 국장급 이상에서 장·차관급,상·하의원,대법원 판사 등을 포함하여 근 1천6백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일단 공직에 임명 또는 선출되면 대체로 3단계의 몸가짐 검정을 받아야만 한다.

먼저 고위직에 내정되면 FBI(연방수사국)로부터 탈세와 부정축재 및 갖가지 위법행위 여부에 관해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탈세는 물론 어느 수준 이상의 법을 어긴 적이 있을 때는 임명권자에게 통보,내정을 취소케 한다. 두번째 단계는 상원 해당위원회에서의 인준청문회. 의원들은 각 기관에 의뢰,해당자에 관한 각종 자료를 갖고 흠을 찾기 위해 파상공세를 벌이며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탈세나 위법행위가 발견되면 인준이 거부된다.

청문회를 통과하면 마지막단계로 취임후 한달안에 정부윤리법에 의거하여 본인과 처,20세 이하의 직계 자녀들의 재산을 인사처에 신고한다. 이 때 모든 동·부동산은 물론 특히 1백달러 이상의 주식배당금 임대 및 각종이자 소득까지 빠짐없이 등록해야만 한다. 인사처는 의심가는 재산의 경우 국세청 등 유관기관에 수시로 조회하기 때문에 재산의 허위·축소신고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정치적 자살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3단계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재산의 정당성이 입증된 만큼 미국 국민들은 공직자들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취득배경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의 초점은 매년 5월15일까지 신고하는 변동내용과 퇴직후의 재산상황이다. 혹시나 재임중 직위를 이용하여 축재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필자가 미국의 재산등록제도를 새삼 소개한 것은 미국이 재산등록·공개제도를 성공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깨끗한 공직풍토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요즘 새 윤리법에 의한 재산공개로 공직사회에 바야흐로 지진이 일고 있다. 공개 나흘만에 김덕주 대법원장이 사퇴하여 앞으로 번질 파장에 대해 공직사회가 아연 긴장하고 있다. 사법부의 수장이 투기성 재산의 보유와 관련,사퇴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대세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법관들이 보유재산으로 인해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김 원장이 자퇴한 것은 사법부의 정화와 개혁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국민들은 지난봄에 이어 이번에도 상당수 공직자들의 축재상황에 경악과 개탄을 금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들이다. 여말의 불가사리는 송도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먹어 삼켰다던가. 이와 재가 된다면 연고에 관계없이 전국 구석구석을 다니며 땅을 사모았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늘 얘기지만 누가봐도 합당하게 모은 재산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나무라서는 안된다. 「깨끗한 부」는 오히려 적극 보호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위장전입 등 온갖 수법에 의한 투기,탈세,불법,편법의 냄새가 진동하여 문제다.

우리나라는 새윤리법으로 공직자의 몸가짐을 검증하는 제도를 마련했지만 한차례 검증뿐인데다 장치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도가 실시된 만큼 1단계 검증만이라도 엄격하게 시행해야 한다. 새정부 출범이후 갖가지 변혁이 있었지만 역시 가장 대표적인 개혁은 재산공개와 실명제다. 때문에 이것이 흔들리면 한국병 퇴치도 신한국 건설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일부에서 운위되는 것처럼 재산공개를 「보복차원의 과거들추기식」으로 보는 시각은 옳지가 않다. 그렇다고 적당한 선에서 덮어두고 매듭짓는다는 것은 혼탁하고 부패한 공직사회로 회귀하자는 얘기밖에 안된다.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고위공무원과 정치인과 법관들이 국민을 어떻게 이끌고 또 어떻게 떳떳한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물론 감정이나 적당주의는 절대 금물이다. 엄격하고 공정한 실사를 통해 불법 탈세 투기 편법,그리고 금융자산의 은닉 등 허위신고가 드러날 경우 엄중문책해야 하고 또 본인들은 당연히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따라서 엄정하게 실사하고 관리하는 재산공개 제도가 뿌리를 내릴 경우 때묻은 인사,검은 재산을 모은 인사들은 아예 공직을 넘겨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깨끗한 공직사회가 자연히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뤄지는 물갈이는 국민의 바람이자 역사의 흐름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누구도 국민의 뜻과 역사를 거역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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