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리고 결박… 「요원」 2명도 동승/승선계약때 “비밀누설 안는다” 각서지난 73년 일어났던 「김대중씨 납치사건」의 중요증인이 20년만에 입을 열어 진상규명의 본격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사건 당시 문제의 용금호에 조리장으로 승선했던 조시환씨(65)가 9일 『용금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이라고 증언,심증으로만 굳어져 있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다.
민주당 「김대중선생 납치사건 진상조사위」(위원장 김영배의원)의 수소문에 응해 이날 하오 국회에서 「양심선언」을 한 조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진실을 밝히고 마음편히 살고 싶었다』고 증언의 동기를 밝혔다.
이날 조씨가 밝힌 사실은 용금호가 정보부의 공작선이었다는 점. 오사카(대판)로 가 김대중씨를 싣고 부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당시 중앙정보부 사건현장 책임자들의 행동 등이다.
조씨의 기억은 김대중씨의 사건당시 회고와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고 당시 「납치공작」을 지휘한 윤진원씨의 실제경력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조씨의 증언은 우선 20년만에 처음으로 심증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로써 민주당의 조사활동은 단순한 당차원은 넘어선 셈이며 정부에 대한 직접조사 촉구가 한결 설득력을 갖게 됐다. 즉 당시 해병대 대령으로 특수임무를 띠고 사건을 현장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윤씨의 존재가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등 상층부로 화살을 들이댈 근거가 마련됐다.
이날 조씨의 목격담은 다듬어지지 않은 것으로 시작했으나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면서 정확성을 더해 갔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용금호에 승선하게 된 동기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중 소개를 받아 조리장으로 계약했다』
정보부 공작선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배를 타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선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또 승선할 때부터 보고들은 것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납치사건후 용금호가 사라지고 우리들의 선원수첩에서 용금호 승선기록이 말소된 것도 그 증거다』
사건당시 출항지와 목적지는.
『73년 8월8일 부산항을 출발,오사카로 향했다. 그전에도 제주도 조랑말을 일본에 싣고 가는 등 화물선으로 위장해와 무슨 짐을 실으러 가는 줄 알았다』
오사카 도착후의 상황은.
『당일 저녁 오사카 외항에 배를 정박시켰고 접안하지는 않았다. 정보부 요원인 정씨와 김씨가 부산서 승선했는데 그들과 조기장 김광식,2등기사 정순남씨 등이 상륙했다. 다음날 밤 10시께 보트가 온다고 해 갑판에 나갔더니 김대중씨가 손이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진채 실려오고 있었다. 사닥다리를 내렸으나 타고 오를 수가 없자 로프를 내려 달아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출항했다』
김대중씨를 어떻게 알아보았나.
『눈이 가려졌어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71년 대선때 그에게 표를 던졌었다. 또 배가 오사카를 출항한뒤 배안의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씨와 김씨가 정보부 요원임은 어떻게 알았나. 이름은 모르나.
『배에서 다들 그렇게 불렀고 누구나 그들이 정보부 요원임은 알고 있었다. 정씨는 그전에도 가끔 우리에게 회식을 제공해 낯익었으나 김씨는 생소했다. 이름은 가르쳐주지도,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씨와 배위에서 만났나.
『세번 만났다. 김선생은 선미의 래더산(닻창고)에 손이 결박되고 눈이 흰붕대로 감긴채 감금돼 있었다. 밥을 갖다주라고 해 갔더니 안먹겠다고 해 돌아왔다』
해상에서 정지했다는데.
『배가 낯선 항로로 가다 갑자기 섰다. 기관고장이나 특별한 사유도 없어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소리는.
『정지한후 30분 가량 됐을까. 비행기 소리가 10여분간 났고 배가 급속항진했다』
용금호는 어찌됐나.
『남항조선소에서 배이름을 유성호로 바꾸고 수리를 거쳐 다른 배가 됐다』<황영식기자>황영식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