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출연한 한 연예인이 불쑥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오늘부터 제 이름을 ○○○으로 불러주십시오. 이제까지 사용해온 가명을 버리고 제 실명을 찾기로 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 취지에도 부응할겸…』어디까지 진담이고 어디까지 농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진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어느쪽이든 그는 제법 격조있는 풍자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예금통장에 적힌 가명·차명만이 아니라 연예활동을 하면서 사용해온 예명까지도 실명화함으로써 자신의 「진면목」을 더 드러내겠다는 뜻이 된다.
그 연예인의 경우에서 끝나는 「실명증후군」도 아니다. 7일자로 공개된 고위공직자 1천1백67명의 재산명세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실명」이고 「진면목」이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엄청난 물량의 공개여서 두서가 없지만 그 하나 하나를 잘 살펴보면 우리 시대의 「진담」을 토해내는 자화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편에서는 국회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율곡사업,12·12,평화의 댐 의혹에 관련된 증언을 듣는 작업이 시작됐다. 감사원의 특감이 이미 실시된 뒤끝이고 일부는 검찰에서도 수사를 하고 있어 김이 많이 샜지만 국회의 국정조사는 본래 그 의미와 무게가 관료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조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는 10일에는 김영삼정부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정기국회가 개막된다. 어느 때보다 할 일이 많은 국회여서 국민의 관심을 모은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김 대통령의 개혁독주를 멀거니 구경할 수 밖에 없었던 정당과 국회가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국회 국정조사정기국회가 동시에 걸쳐서 진행되는 요즘은 따라서 천하의 「정치계절」이다. 그리고 이 계절은 우리 정치가 진정한 뜻에서 근대화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한 연예인의 이름만이 아니라 정치정치인에게도 「제 이름」 「제 목소리」 「제 실력」을 요구하는 「정치실명제」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는 어차피 검은 돈의 정치권 유입을 차단하게 되므로 정치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되어있는 제도다. 「돈의 정치」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온 우리 정치권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은 이 제도의 충격의 강도를 말해준다.
돈의 힘으로 선거를 하고 정치를 하던 이른바 금권정치는 더이상 발을 붙일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 실명시대의 꿈이다. 돈의 힘이 아닌 제 실력의 힘,보스의 이름이 아닌 제 이름,남의 소신에 따르는 것이 아닌 제 판단으로 하는 정치가 정치의 실명화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꿈은 현실에서 가당하기나 한 것인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으니 검은 돈이 이제 영영 자취를 감출 것인가. 우리 사회 발끝에서 머리 끝가지를 오래 오래 마비시켜온 부패의 달콤한 유혹이 하루 아침에 단절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정치권이 과연 금권의 금단현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 준비와 각오가 만만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첫번째 응답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답은 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관계법의 개정작업에서 당연히 나와야 한다. 금융실명제가 정치개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돈 안드는 정치를 위한 관계법의 대전환·대개정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는가. 국회다. 국회가 개혁의 짐을 져야 한다. 김 대통령 혼자서 제작·감독·주연하는 드라마가 끝도 없이 진행되는 모습은 이제 보기가 불안하다.
이제까지 김 대통령의 개혁은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직거래」로 이뤄져 온 것이 특징이다. 정당과 국회의 소외,정치의 실종이 필연적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비와 문제가 시시콜콜 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도 안된다.
국회의 국정조사에 TV 중계가 성사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의회주의가 얼마나 스스로 소외되고 위축되었는가 하는 사실의 반증이다. 「영국식 선거제도」만 하더라도 선거법 개정작업의 논의는 위로부터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형식이 아니라 정당과 의회에서 짜내고 토론하고 걸러내는 민주적인 과정이 더 필수적이다.
때맞춰 10일 하오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색다른 시민대회가 예고되고 있다. 대통령의 개혁독주에 밀려나 위축되고 왜소해진 우리의 의회정치를 향해서 『국회 힘내세요!』를 외치는 시민단체들의 모임이다. 「국회활성화와 개혁입법을 위한 시민대회」가 예정하고 있는 구호들 가운데는 『사랑해요 국회! 개혁입법 부탁해요』도 들어있다.
국회가 힘을 내야 한다. 그래서 산적한 정치개혁의 난제를 떠맡아야 한다.<본사 주필>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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