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례 중동전 패배 주권 뺏겨/평화회담 통해 독립계기 마련중동분쟁의 근저에는 팔레스타인의 한과 고통의 역사가 흐르고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대한 증오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독립투쟁사이다.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투쟁은 2차대전후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민족간의 갈등의 씨앗은 19세기말 유대인들이 2만6천㎢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거 유입하면서부터 이미 배태됐다. 당시 러시아와 동유럽을 휩쓸던 반유대주의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든 유대인들은 서방국가의 유대계 자본가들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집단 거주지를 형성해갔다.
1917년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은 시온국가의 건설을 약속했고 30년후인 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이스라엘과 아랍국가를 수립키로 잠정 결정했다.
이에 고무된 유대인들은 48년 5월 영국이 위임통치를 마감하고 철수하자 텔아비브시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스라엘로서는 1천8백년간의 나라없는 설움을 씻게됐지만 전쟁과 유혈충돌의 암운이 중동지역을 뒤덮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아랍진영은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한지 하루만인 5월15일 이스라엘을 침공,2년 가까이 끈 1차 중동전을 시작한다. 이후 이스라엘은 56년 2차 중동전쟁으로 이집트로부터 시나이반도를 빼앗았으며,6일만에 끝난 67년 3차 중동전을 토이해 시리아의 골란고원 및 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를 강점했다.
영토와 국권을 회복하려는 팔레스타인의 노력은 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출범으로 구체화된다. 당시 아랍민족주의의 기수로 자처하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아랍연맹의 후원을 얻어 PLO를 출범시킨 것이다.
82년 6월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를 침공했으며 시리아도 등을 돌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다시 튀니지 등 아랍각국으로 쫓겨났다. 그해 9월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습격,1천5백명의 비무장 난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잦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PLO의 대이스라엘 투쟁은 줄기차게 계속됐다. 특히 74년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조직으로 인정받은 PLO는 단순한 「저항단체」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78년 캠프 데이비드협정 체결로 아랍권의 대형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등 주변정세의 급변속에서도 팔레스타인의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열망은 식을줄 몰랐다. 87년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망명정부를 세운 PLO는 88년 의회격인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를 통해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및 점령지역에 가장 많은 2백10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요르단에 1백12만명,레바논 39만명,쿠웨이틔 32만명 등 주로 중동전역에 흩어져 살고있다.
그러나 4백50만 팔레스타인인은 결코 독립국가 수립의 열망을 버리지 않고있다. 이들은 지난달 31일 워싱턴에서 재개된 중동평화회담의 추이를 지켜보며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이상원기자>이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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