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전 9월 한국이 소련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을 때의 분위기는 감격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전쟁위협이나 안보걱정을 안해도 된다며 모두들 기대에 들떴었다. 노태우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 그리고 곧 이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제주방문으로 양국관계는 더욱 흥분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91년 한국이 조기수교의 대가로 30억달러를 제공키로 했다는 소식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숨겨져 있던 막후 수교협상의 내막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 형편에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줄 수 있는가. 준다고해도 소련의 능력으로 갚을 수 있는가. 그 막대한 경협자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소 수교의 환호성은 어느덧 이런 의문과 우려로 바뀌기 시작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을 찾으면서 나온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6·25 남침에 대한 책임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에 대한 책임도 불문에 부친단 말인가. 그저 조기수교에만 급급한 나머지 받을 것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돈만 갖다 바친단 말인가. ◆외화내빈의 졸속외교가 바로 북방외교였던가 하는 뼈저린 반성은 소련이 붕괴되면서부터 더욱 실감나게 우리 피부에 와 닿았다. 경협자금은 러시아의 경제로 보아 도저히 상환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뒤늦게나마 30일 외무부 발표를 통해 나머지 15억달러는 줄 수 없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같은날 러시아는 KAL기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여객기 격추에 잘못이 없다고 발뺌했다. 모든 책임은 조종사에게 있다고 뒤집어 씌운 것이다. 전쟁상태도 아닌 평시에 비무장 여객기를 전투기가 미사일 공격을 가해 전원을 몰사시켰는데도 전혀 책임이 없다니. 우리는 지난날의 졸속외교를 뒤늦게 원망해야 할지,아니면 러시아의 무책임한 태도를 야속하다고 탓해야 할지 어리둥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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