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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빙위를 걷는다/이재승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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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빙위를 걷는다/이재승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3.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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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제가 실시된지 열흘이 좀 지났다. 우려했던 충격파가 예상보다 빨리 가라앉는듯 하다. 경제의 주요 풍향계인 증시에서 첫 이틀동안 주가가 대폭락을 보이더니 대반등에 이어 계속 견실한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은행예금 인출현상도 없었다. 다만 동아투금에서 고객들의 예금인출사태가 있었으나 정부측의 인가취소설 부인과 무제한 자금공급 약속으로 조기에 진화됐다. 한편 부동산시장이 아직은 투기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금·보석·골동품·고서화 등의 환물투기현상도 역시 보이지 않고 있다. 해외자금 도피도 새삼스럽게 급증기미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측했던 이런 반사적인 부작용이 표출되지 않았다고해서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가명·차명 등으로 돼있는 「검은 돈」을 우선 포위해놓고 동태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는 10월12일까지 베일을 벗게 시간을 준 것이다. 그동안은 실명제 실시가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을 치유하는 보완대책에 역점을 둬야 한다. 보수가 잘못되면 「실명호」는 침몰될 위험이 있다. 「실명호」의 최대 위협은 자금흐름의 왜곡이나 변화다. 경제의 동맥인 자금의 흐름에 이상이 생기면 경제에 동맥경화증 등 각종 질환이 생기게 돼있다. 그런데 지금 자금경색의 이상증세가 나타나 있다. 사채시장과 채권시장의 철시와 위축이 그것이다.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융통해온 영세 중소기업과 영세 개인사업자 등 「없는 사업자」들이 돈줄이 끊겨 부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긴급운전자금 3천억원,지방중소기업자금 8백30억원,긴급경영안정지원자금 2천억원을 긴급 책정했으나 은행에서 담보 등을 요구,소진실적이 낮다. 이경식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중소기업 부도사태 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그러나 현행 자금배분 방식으로는 실효가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방법을 바꿔야 한다.

또한 채권시장의 계속적인 마비는 대기업까지 주름을 준다. 실명제가 실시된 13일이후부터 21일 현재까지의 사이에 기업들은 모두 2천6백억원 상당의 회사채를 발행했으나 5백억원 상당만 소화됐다.

장기신용은행은 실명제 실시이전 1일 2백억내지 3백억원의 장기채가 소진됐으나 요즈음에는 1백억달러의 소화도 어렵다고 한다. 채권시장의 정상화가 시급하다. 한편 은행과 단자사의 인기있는 금융상품의 하나였던 CD(예금증서)는 발행과 유통이 완전히 중단됐다. 무기명이라 인기가 있었고 은행에서 대출의 꺾기 수단으로 즐겨 사용돼왔던 것인데 액면이 최소한 5천만원으로 국세청의 자금출처 조사대상이 돼있어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총발행고는 약 12조로 추산되는데 8월 하순 상환만기가 되는 약 2조원의 향방이 관심의 대상이다. 정부가 제도금융권에 들어있는 「검은 돈」을 포함한 모든 돈을 통제하고 있는 주요수단은 국세청의 자금출처 조사(실명화되는 가·차명예금 5천만원 이상)와 국세청에의 통보(순인출액 3천만원 이상)다.

자금흐름의 경직성을 풀자면 이 두기준을 상향조정해야 한다. 정부의 반대는 실명제의 사정측면을 강조한데서 나온 것 같은데 부작용과 저항을 줄이자면 역시 재고돼야 한다. 한편 가·차명의 「검은 돈」 가운데는 노출되는 경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돼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을 돈들도 30,40%가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러한 돈들을 사회간접자본투자용의 장기저리 채권으로 소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상당히 있다. 1백% 실명화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 문제이나 「검은 돈」의 제도금융권 흡수차원에서 검토해볼 수도 있다.

금융실명제는 가명·차명을 실명으로 바꾸는 것이지마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의식개혁이 뒷받침돼야 한다. 길은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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