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주머니·부적 휴대하기/합격기원 은반지 만들기/시험 1백일전 술마시기/“진학불안감 해소” 관행으로 굳어져/“대학만 간다면…” 묵인하는 학교·가정풍토 고쳐져야현재 우리나라 고교생들을 지배하는 문화는 입시문화이다. 입시문화란 대학입학전까지 모든 것을 유보해야 하는 제도적 틀속에서 학생들이 이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다양한 행위양태와 풍속을 말한다.
이들의 입시문화는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성문제 결혼 가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성장기의 「발달과업」을 대학입학 이후로 유예하는,아니 유예하기 위해 학생들이 스스로 창조한 문화이다.
고등학교에서 이상형으로 생각되는 학생형은 공부이외의 모든 요소를 유보하고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의 「공부하는 자세」라는 철저한 무관심이다. 재미있는 것을 보아도 깊이 빠져들지 않고 남의 일이라면 일단 관심을 끊어비리려 하는 개인주의가 만연된다.
일부 학부모들은 『공부만 잘하면 버릇이 없어도 용서가 된다』 『10등안에 들면 무엇이든 사줄께』 등 달콤한 말로 자녀들을 설득하고 있다.
우리 고교생들에게는 공부와 놀이가 엄격히 구분된다.
학생들의 공부는 철저한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고2말까지 「종합영어」를 두번 마스터하고 「수Ⅰ정석」을 한번 본다는 식으로 시간을 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놀이문화란 거의 없다.
요즘 학생사회에서 진정한 친구관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친구는 곧 입시경쟁자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너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기니 걱정말고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실제로 강남 K고 3학년 김모군(18)은 『살길은 공부밖에 없다. 3년동안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남들보다 30년을 앞서가는 거다』라는 말을 부모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공부만을 강요하는 입시문화에 길든 학생들의 독서패턴도 많이 달라졌으며 여가를 즐기는 방식은 한마디로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나쁜 것이 놀이의 결과가 장기간 후유증을 남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학생들은 만화를 선호하고 있는데 간단히 읽어 치울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무협지 3류 연애소설 등이 인기가 있다.
서울 S고의 정모교사(47)는 『옛날에는 「무정」 「좁은문」 등 문학소설을 많이 읽었으나 지금은 간편한 만화 등을 많이 본다』며 『아마도 빨리 읽어치우고 수험공부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간단한 것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입시문화속에서 성장기의 풍성 형성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길고 감명적인 장편소설 등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열심히 공부하는데서 찾고 있으며 공부에 집중할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성적이 떨어지지나 않을까,희망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팽배해있다.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주술적 믿음에 의지하는 경향이 번져가고 있다.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대학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들에겐 백일주라는 풍속이 있다. 입시를 백일 앞둔 날 수험생들은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며 불안감을 해소하고 다가올 결전을 다짐하는 「행사」를 치른다.
○엿선물은 옛말
재수생 전모군(19)은 『백일주행사는 선생님들도 묵인하는 실정이며 오히려 「적당히 마시고 사고나 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정도』라고 말한다.
고려대 불문과 1학년 정대우군(19)은 『최근에는 백일주뿐만 아니라 7땡주(77) 5땡주(55) 1땡주(11)까지 마시는데 맥주는 거품이 많이 생겨 입시공부가 물거품될 확률이 있어 소주나 막걸리를 마신다』며 『이외에도 「축합격」이라고 새긴 은반지를 끼거나 자신이 태어난 해의 10원 50원 1백원짜리 동전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고3을 앞둔 송년회에서 즉 「2말3초」때 레스토랑 등에서 술을 마시며 고3에서의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는데 샴페인을 터뜨리며 「생존을 위하여」 등의 구호를 외친다.
이밖에 13일전에 마시는 구사일생주가 있다. 9일 더하기 4일,즉 구사일생을 뜻하는 의미에서 구사일생주를 마시며 보름달이 떠있는 달밤에 어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어 준 것을 복주머니에 넣어 교복의 주머니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또 백일전에 각기 다른 여자의 방석 7개(행운의 숫자)를 훔쳐 시험당일까지 발각되지 않으면 합격한다고 믿는 풍속은 고전중의 고전이며 남학생이 여자속옷을 입고 시험을 치르는 경우 등 애교로 보아넘기기엔 비정상적인 부분도 있다.
재수·삼수생의 경우는 고3 재학때의 교실에 찾아가 백일주를 마셔야 합격한다는 속설 때문에 밤늦게 학교에 들어가다 숙직교사와 숨바꼭질을 하기도 한다.
대학입시를 일주일정도 앞둔 날부터는 엿이나 찹쌀떡·초콜릿 등을 선물로 받기도 하는데 요즘엔 엿은 사절이다.
대학입학의 문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더욱 좁아지면서 최근에는 「고통분담」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나고 있다.
한 가정에 고3 수험생이 있으면 모든 행사가 수험생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고3학생들은 집안의 상전이며 모든 가족이 고3학생 위주로 움직이게 된다.
자녀가 고3에 진학하면 「집안의 TV를 없앤다」 「친구도 못데려 온다」 「밤에 늦게 못들어온다」는 등 1년내내 가족들도 쥐죽은듯이 수험생의 눈치를 보며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어머니들은 수험생들이 백일주를 마시는 날 백일불공을 드리러 절을 찾는다.
조계사의 한 직원은 『대입수능시험 백일전인 5월13일부터 학부모 1백5여명이 10만원의 회비를 내고 새벽 4시 하오 6시 하오 10시 등 3차례 축원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어머니들은 나름대로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천배 만배를 하기도 하며 시험을 앞두고 원서를 쓸 무렵에는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찾는다.
올해에는 대입수능 1차시험이 8월20일로 정해져 고3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이 휴가계획을 취소하거나 시험이후로 미뤄야 했다.
입시문화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대입수능시험일인 2일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 등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출근시각이 상오 10시로 늦춰지는데다 국민들은 이런 관행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며 오히려 수험생을 둔 학부모를 안쓰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시험당일은 사회구조가 완전히 수험생위주다. 대중교통수단의 우선순위에서부터 항공기의 이·착륙 금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학생지도 강화를
교통부는 교육부 등으로부터 듣기평가시간에 항공기 소음이 없도록 서울·김해 등 주요 공항에서의 항공기 이·착륙 통제요청을 받고 2일 듣기평가가 치러지는 37분동안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내렸다.
양재고의 정귀주교감(55)은 『왜곡된 입시문화의 일차적 책임은 사회가,다음으로는 부모들이 져야 할 것』이라며 『무엇보다 「하오 10시까지 학생들은 학교에 붙들어만 놔다오」라고 부탁하는 부모들의 불안감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해마다 대학 입학철인 3월이 되면 지나친 학부모들의 자식사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잘못된 입시문화의 종국적인 문제는 학생들의 품성교육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학생들을 자기중심적이고 즉흥적이며 나약하고 책임감이 없도록 만드는데 일정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MeGeneration(자기중심주의)에 충실한 입시문화속의 학생들을 나약하고 책임감이 없다는 비판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공부이외의 여러 책임을 질수 있는 학교의 자치활동 등 꾸준한 과제가 부과됨으로써만이 해결될 수 있다.
◎고3학생에게 주는 「충고」/공부만 집착말고 정서함양도 신경/틈틈이 독서등 「마음의 여유」 갖길
『우리 시절의 입시가 마라톤이나 넓은 야외경기장에서의 축구시합이었다면 현재의 입시풍토는 1백m 달리기나 좁은 코트안에서의 농구경기쯤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대 법학과 김일수교수(47·형법)는 2여년전 자신이 대학입시를 치를때의 입시문화와 현재 고3 딸이 겪고있는 입시문화를 이렇게 비유했다.
강원 명주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를 여의고 강릉중·고를 다니며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서 공부했었다.
김 교수의 중·고시절인 60년대 초반에는 대학별로 입시가 치러졌고 중학입시도 있었다.
김 교수는 고교시절 강원도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중·고생 종합교양잡지인 「학원」과 헤밍웨이,토머스 하디의 소설을 틈틈이 읽고 수필이나 시 등을 투고하거나 문학콩쿠르에 참가할 만큼 입시공부에만 온힘을 쏟지는 않았었다.
또 자신이 배우고 싶었던 독일어를 교사가 없어 독학,이때 닦은 실력으로 대학졸업후 독일에 유학가 학자로서의 삶을 사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우리 시절에도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가정교사를 두는 등 입시열기는 대단했지만 지금처럼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며 『지금은 경쟁률이나 공부량이 너무 방대해 오히려 학생들이 대학진학후 전공분야를 전문적으로 탐구할 체력·활력이 고교에서 모두 소모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현재 입시문화에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무리한 학습량 등으로 고교생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져 대부분의 부모들이 도덕이나 예절교육 등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김 교수는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비교적 여유있게 입시준비를 했지만 고교졸업후 고려대 법학과에 수석입학했고 고교때 비축했던 활력으로대학 졸업 이듬해 12회 사법시험에 7등으로 합격했으며 지금까지도 「사형폐지운동」 등 활발한 사회활동이나 국내에서 가장 두꺼운 법률교과서를 출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김 교수는 고교시절 주말이면 풀벌레 우는 고향에 가서 공부를 잊고도 살아봤고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뛸만큼 정서도 메마르지 않은 생활속의 공부를 했었다. 김 교수는 『청소년들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사시키고 낙과시키는 지금의 입시문화에 대해 반성과 시급한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일수 교수·고려대 법학과>김일수>
□특별취재반
▲사회부:설희관차장·이원락·김현수·장인철·여동은·현상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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