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99년 무기명투표 선출/비주류 부주석 2명 정치부담이등휘 대만총통은 18일 예상대로 국민당 당주석직에 선출되었으나 그의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이다. 때문에 그에겐 이제 난국에서 정치력의 발휘가 더욱 절실해졌다. 이같은 평가는 그가 이번 국민당 14차 전당대회(14전)에서 국민당 창당 99년만에 처음으로 무기명투표 방식에 의해 선출됐다는 권위의 손상 때문만이 아니다. 또 대회를 열흘 앞두고 대륙출신 2세들이 중심이 된 비주류 소장파의 탈당으로 당이 어수선한 가운데 뽑혔기 때문도 아니다.
그가 입은 「상처」는 그와 주류파들이 피하고 싶어했던 부주석제의 「혹」을 안고 당주석직에 선출됐다는 사실이다. 4명의 부주석은 이원족부총통,학백촌 전 행정원장,임양항 사법원장,연전 행정원장 등으로 주류와 비주류가 2명씩으로 안배되어 있다. 그러나 비주류측의 학백촌과 임양항의 정치적 비중은 주류측의 이원족과 연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등휘를 견제함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대체할 수도 있는 정치적 헤비급의 인물들이다. 특히 임양항은 전당대회전에 이미 아직 2년반이나 남은 총통선거에 나설 뜻을 밝히고 이미 학백촌의 지지도 얻어낸바 있다.
이런 공공연한 「도전자」를 부총통으로 거느리고 당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역시 비주류에 속하며 지난 2월 밀어내다시피 행정원장직에서 사임케한 학백촌의 부주석직 「롤백」 역시 이등휘에게는 결코 반가울리 없는 사태 진전이다.
이등휘체제를 공고히 하고 또한 국민당의 대만화를 본격화하려던 그와 주류파의 계산은 상당부문에서 「차질」이 빚어졌다. 이등휘가 비주류파를 끌어안은 것은 탈당사태 때문이었다.
대만출신인 이등휘가 취약한 자신의 정치기반에도 불구하고 장경국 사망이후 5년여를 거치면서 국민당의 리더십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민의 85%를 차지하는 내성인,즉 대만출신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이등휘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자기나름의 정치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종신직 의원들을 은퇴시켰고 지난해 12월에는 사실상 첫 의회선거를 통해 국민·민진당의 양당구조를 정착 시킬 수 있었으며 내성인을 정치의 중심권으로 끌어들였다.
이등휘는 23년 1월생으로 올해 70세. 대만 대북현 삼지향 보평촌에서 태어났다. 조부의 원적지는 복건성 영정현으로 대륙과의 연계도 그리 멀지않다.
46년 일본 동경대학 농업경제학과를,49년엔 대만대학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했다. 59년과 68년에 미국에 유학,농업경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7년 대만 농업부흥위를 거쳐 78년 대북시장에 임명됐다. 81년 대만성주석을 거쳐 부총통에 재임중인 88년 장경국총통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만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통직에 올랐다. 이해 7월의 국민당 13차 대회에서 국민당 주석에 선출돼 당·정의 최고직위를 모두 차지했다.<북경=유동희특파원>북경=유동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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