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민족의 힘을 측정하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쓸만한 인재를 얼마나 길러내고 있는가이다. 비록 조국이라고 발붙일만한 땅이 없이 이곳 저곳 이방인들 틈에서 박해받는 신세로 살아오면서도 세계를 주름잡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배출해온 유태민족이 가장 극단적인 예라 하겠지만,얼마전까지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던 베트남이나 중국 등도 무서운 속도로 고급인력을 길러내고 있다.고학력 소지자들의 배출이라는 견지에서만 본다면 우리의 전망도 매우 밝다. 경제발전에 비해 공교육에 대한 질적 투자는 크게 부족했었지만,흔히는 교육열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우리의 뿌리깊은 학벌 숭앙주의 때문에 엄청난 돈이 국내외에서 사교육비로 지출되었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각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고급인력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국내의 여러 대학들에서는 물론 세계의 유명한 대학들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의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앞둔 한국 학생들이 엄청난 수로 줄을 서고 있으니 고급인력의 적체현상은 크게 심화될 전망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은 고급인력을 어떻게 길러내는가 하는 일 못지 않게 이미 길러진 인력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치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기관은 물론 대학이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으로 교수 공채제도라는 것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공채제도가 아직까지는 매우 허술하고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점점 더 치열해질 경쟁에 대비해서 보완되어야 할 점이 많다.
일단 교수로 채용된 사람들은 정년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 군사정권과 대학의 행정당국이 교수 고용계약제를 온당치 못한 목적으로 악용하던 사례가 다소 있었기 때문에 교수들은 거의 누구나 계약고용제 알레르기성 반발을 느낀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지구촌의 사정과 학문의 추세속에서 대학이 계속 첨단의 지식과 기술을 생산해 사회의 중추기능을 발휘하려면 낙후된 부분을 걸러내고,새로운 인재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잔인한듯 하지만 상당한 비율의 교수 인원을 계속 시한부 계약제로 고용하는 길 밖에는 없다.
조교수나 부교수를 3년 또는 5년 정도의 계약제로 고용한후 계속 계약을 거듭하는 경쟁속에서 학자로서의 삶이 체질화될 것이다. 능력이 입증된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정년을 보장하고 교수단의 정회원으로 영입하는 제도가 학문적 경쟁이 치열한 여러 교육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현직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은 사실상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들에게 계약제를 소급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신규채용부터 새로운 계약제를 적용하는 동시에 노장들의 조기 퇴임을 유도하기 위한 매력적 대안을 과도기적으로 제시한다면 대학의 피의 순환이 전처럼 어느 해에 누가 태어났는가 하는 시운에 크게 지배받음이 없이 비교적 무리없이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고급인력을 흡수하는 또 한가지 방법으로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연구원으로 대우하는 제도이다. 현재로는 정부나 그밖의 기관들이 지급하는 연구비들이 모두 전임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응모자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면서도 취직을 못하는 사람은 몇중으로 고통을 겪는다.
대체로 젊고,아직 전임자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잡다한 행정에 시간을 빼앗길 염려가 없고,동시에 취업을 위해서라도 자기의 학문적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말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자격과 동기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에게도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전임직 교수보다 우선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돌아가야 한다.
지난 몇십년간에 이루어진 우리의 경제적 발전이 눈부시게 빨랐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구세대가 학문적으로 낙후되어가는 속도로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도 실험기재도 외국도서관을 방문할 기회도 별로 없는 속에서 날마다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굴욕적 행정 횡포를 감수하면서도 대학을 지켜온 사람들이 경제발전 덕분에 세계를 내집처럼 넘나들며 훨씬 나아진 여건속에서 학문을 할 수 있게 된 새세대 앞에서 결코 인간적으로 변명조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보다 좋은 여건에서 학문적으로 보다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귀한 젊은 인재들이 가장 인간적으로 공정하고,사회적으로 효율적이게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구세대가 새세대를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빚갚음이다.<서울대 교수·서양사>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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