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수조규모… 대부분 임직원등 명의로 관리/일부기업선 “불가피한 계좌는 포기 검토”도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된 이후 기업의 비자금 처리문제가 재계의 최대현안중 하나로 부각됐다. 각 기업들마다 실명제 발표 직후부터 연속회의를 열어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 처리방안을 협의하고 있으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거래은행으로부터도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재계가 금융실명제 조치를 일제히 환영하고 나섰으나 정작 내심으로는 비자금의 처리를 놓고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자금이란 각종 접대비와 기밀비 사례비 등 기업활동이나 기업주가 개인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된 자금을 통칭하는 것이다. 정치권에 건네진 돈이 이 자금의 일부인 것은 물론이다. 결국 정경유착과 기업간 뒷돈거래 등 한국적 경영풍토에 적응하고 기업주가 회사돈을 빼돌리기 위한 파이프라인으로 조성된 검은 돈이 바로 비자금이다.
각 그룹마다 조성된 비자금 금액의 차이는 있으나 30대그룹의 경우 많게는 수백억원대에서 적게는 수십억원에 달하고 중소기업들까지 거의 모든 기업들이 비자금을 조성해 그 규모는 현재 수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자금은 일반적으로 기업간 거래과정의 단가조작이나 이중계약 장부조작 등으로 조성되며 여러 차례의 돈세탁을 거쳐 내밀하게 사용돼왔다.
이 자금은 따라서 기업의 회계장부에 기재될리 없고 떳떳하게 내놓고 실명으로 조성될 수도 없었다. 대부분 기업들이 핵심 임직원이나 기업주의 측근 이름으로 비밀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관리해왔다. 기업들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한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비자금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가명과 차명으로 조성해 놓은 비자금의 규모가 엄청나 마땅히 다른 은신처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앞으로 비자금을 만들기도,전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명제 실시를 예상하고 미리 대비해 온 일부 기업의 경우 다소 사정이 나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굴지그룹의 자금담당 임원인 K씨는 『새 정부 출범직후부터 실명제 실시에 따른 대응방안을 모색해왔다. 비자금계좌의 상당부분을 믿을만한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일부 자금은 현금으로도 확보했다』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러나 『상당수 기업들이 비실명 비자금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중이며 일부 불가피한 계좌는 포기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당장 밀어닥친 자금난 이상으로 비자금 처리로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비자금 거래가 많았던 건설 해운 방위산업 업체들의 고민은 기존 비자금의 처리도 문제지만 앞으로 어떻게 비자금을 조성,거래하느냐에 있다. 거래관행상 상당기간동안 비자금 없이 경영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일부 기업의 관계자들은 『앞으로 상거래가 투명해져 비자금을 조성해야하는 부담이 없어질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으나 이들 업계는 『아주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입을 모으고 있다.
8·12 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로 검은 돈의 상징이었던 기업의 비자금이 새로운 운명을 맞았고 앞으로 기업 경영방식의 일대 방향전환이 불가피하게 됐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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