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사흘,겉으로는 태연한 것 같지만 정치권은 당혹감속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다. 여야 할 것 없이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고 말하면서도 속마음은 다르다. 사석에서 만난 의원들은 거의 예외없이 『언젠가 해야할 일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속시원하게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민자당이나 민주당이나 연일 회의를 열어 실명제를 따른 보안책을 촉구하고 있지만 소속의원들의 생각은 이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 않나 싶다. 비교적 솔직한 의원들은 『혼란스러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8·12조치」의 충격성을 부각시킨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돈주머니」가 옥죄어들 것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민자당 의원은 『정치자금은 대부분이 지하경제의 영역에 속해왔던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그 수원지는 기업의 비자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평소 기업하는 친구들이 조금씩 도와줘서 월 1천만원선을 넘는 지구당 운영비용을 메워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꾸려갈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또다른 고민은 금융실명제 때문에 감추고 싶은 자신의 정치활동 이면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앞으로 개인의 금융거래 내역에 대한 비밀유지를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정치인들은 정보정치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지 않고 있다.
이같은 불안은 「제2의 사정한파」에 대한 우려로 이내 이어진다. 재산공개를 앞두고 부동산 등을 처분,가명계좌에 돈을 묻어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정계에 나돌고 있고 심지어는 민자당 민정계의 경우 20여명에 달한다는 소문도 있다. 또 그동안 가명계좌를 이용한 상당수 의원은 재산등록때 뺀 돈을 포기하거나 처벌받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할 판이다. 한 재선 의원은 『새정부 출범이래 정치인은 재산공개에 코꿰이고 실명제에 발묶였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물론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은 생명과도 같다. 실명제로 비롯된 경제개혁은 아직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도 개혁을 강요하고 있다. 때문에 정치인들이 당황하는 것은 이해가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실명제가 지니는 명분과 자신이 당할 불이익 사이에서 표리가 다른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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