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 어려서 헤어진 소리하는 누님 송화를 동호가 수소문끝에 어느 주막에서 찾아낸다.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한다. 성화는 눈이 멀어 손님이 동생인줄 모른다. 동호가 북채를 잡고 송화는 심청가중 심봉사가 눈 뜨는 대목을 밤늦도록 부른다. 날이 새자 동호는 말없이 떠난다. 송화는 아버지 유봉이한테서 함께 소리를 배우던 어릴때의 그 북장단 소리를 듣고 손님이 동호인줄 알고 있었다. 송화는 동생에게 다시는 들키지 않을 곳을 찾아 길을 나선다.더러는 이 장면을 놓고 동호가 누님 송화를 어렵사리 만나고도 그 소리에 서린 한을 다치지 않게하기 위해 그냥 돌아서는데 그 결어의 전달이 미흡하다고도 하고,또 더러는 영화전체에서 한이라는 주제가 주인공들의 입으로만 씹히고 있을뿐 영상에 절여있지 못하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채로 영화 「서편제」는 지금 한 문화현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주 8월9일로 개봉 4개월만에 90년 「장군의 아들」이 세운 67만8천여명이라는 한국영화 최다흥행기록을 깼다. 이 추세대로면 10월에는 관객 1백만 돌파도 가능하리라고 한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덩달아 원작소설과 주제음악 음반이 불티가 난다. 갑자기 판소리가 붐이다.
사실 우리 영화는 너무 왜소하다. 국산영화의 제작 편수는 91년 한해동안 1백21편이었다. 이 숫자만으로는 과히 실망할 것이 못된다. 연간 8백편이 넘는 인도나 3백편이상의 미국에는 못미치더라도 영화의 나라인 프랑스의 1백46편(90년)이나 이탈리아의 1백17편(89년)과는 엇비슷하다. 인구수로도 두나라 다 우리의 1.5배 미만인데 흥행기록에는 격차가 크다. 1억2천만명의 관객을 모았다는 미국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별개로 하더라도 프랑스만 볼때,장 가뱅 주연의 「레 미제라블」이 9백90만명,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뉘엘」이 8백90만명,얼마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모은 이브 몽탕의 「마농의 샘」의 6백60만명을 끌어들였다. 사상 처음으로 1백만명을 향해 안간힘을 쓰고있는 우리 영화의 낮은 키를 알수 있다.
이런 열세속에서 「서편제」가 1백만명의 관객을 돌파한다면 우리로서는 하나의 「마의 벽」을 넘는것이 된다. 벽을 넘는다는 것은 새로운 도약을 뜻하는 것이고 영화관객의 단위를 바꾸는 일은 영화발전의 전기를 마련하는 일이다.
물론 관랙의 숫자가 반드시 양화의 점수인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편제」는 올해 대종상에서 작품상,감도상 등 6개부문을 수상함으로써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최고흥행기록을 더욱 값지다. 우리 고유의 판소리를 영화화한 것이라는 데도 가치가 다르다.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에 우리의 소리를 입힌 가장 한국적인 영화다. 「서편제」의 성공은 진정한 우리 것의 재발견이요 그 개가라는데 의의가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임권택감독 자신도 『우리가 천시하며 버리고 살던 우리것에 대한 자각에 「서편제」가 불을 지른것 같다. 우리 이야기를 우리식으로 이야기 하는것만이 우리영화가 외국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길이다. 「서편제」가 그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고 말한다.
한국영화가 세계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80년대부터다. 81년 바로 임권택감독의 「만다라」가 베를린영화제에서 본선에 진출한후 87년이래 88.89년에는 연달아 임 감독의 「씨받이」 등 토속성 있는 작품들이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주연여우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 영화는 크게 발돋움했다. 이렇게 임 감독은 자신의 작품인 「장군의 아들」의 기록을 스스로 경신할만큼 국내적으로 베스트셀러 감독일뿐 아니라 우리 영화를 세계에 끌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었다. 일본영화가 구미 각국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이미 50년대다. 51년 구로자와 아키라(흑택명)의 「라쇼몽(나생문)」의 베니스영화제의 금사자상을 타면서였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세계적 대감독을 내세워야 한다. 「서편제」가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살리는데 큰 뒷받침이 되어줄 것이다. 양질의 영화가 흥행에도 성공하는 것은 우리 영화산업의 양심에 큰 용기가 된다. 관객의 동참이 영화강국으로 키운다.
「서편제」를 상영중인 단성사 앞에서는 지난 11일 관객 70만명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영화의 세주인공이 나와 영화속의 진도아리랑을 실연해 관객의 호응에 답례했다. 단성사는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0년부터 영화전문극장이 되면서 가끔 연극 상연도 겸했지만 개관직후에는 판소리나 창극 등 전통 연희의 공연장이었다. 판소리로 시작한 최고의 극장에서 판소리 영화로 최대 관객을 모은 인연도 뜻 깊다.
우리나라 극영화의 효시라는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가 나온것이 1923년이었다. 마침 올해는 그 70주년이 된다. 우리 영화의 역사는 이제 장을 바꾸어야 할 때다. 「서편제」의 성과는 영화사의 경사다. 70주년은 한국영화의 웅비를 위한 제2의 원년으로 성대히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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