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이유 원호법 혜택 제외/“대일협력자” 귀국은 엄두못내/현재 35명 생존… 동진회 조직 보상투쟁「8·15」가 되면 서러운 사람들이 있다. 광복된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어도 안길 수 없고 일본정부로부터도 버림받고 있는 「한국인 전범들」.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일협력자」라는 낙인 때문에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들을 이용했던 일본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원호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내팽개치고 있다. 일본군에 몸담았거나 군속으로서 연합군 포로감시요원으로 일하다 전범으로 지목된 한국인들은 모두 1백48명이었다. 이중 일본군 고급장교로 복무하는 등 A급 전범으로 분류된 23명은 사형당했다. 나머지 1백25명이 포로학대 등의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됐으며 이중 90여명이 전후 스가모(소압) 형무소에서 복역한후 풀려나 오갈데 없이 일본에 발이 묶였던 것. 현재 35명이 일본정부가 전후처리를 깨끗하게 매듭짓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동진회란 모임을 조직,보상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최근 일본 호소카와(세천호희) 신임총리가 『2차대전은 침략전쟁으로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발언한 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인 전범들이 발생한 과정과 이들의 고달픈 생활상을 문태복 동진회 회장(70)을 통해 들어봤다.<도쿄=이재무특파원>도쿄=이재무특파원>
▷발단◁
일본 육군성은 42년 5월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군속의 자격으로 연합군 포로감시를 맡기기 위한 「포로처리요령」을 만들고 포로수용소 감시요원을 모집했다. 대상연령은 20∼35세,월급은 50엔(조선이나 대만내 근무자는 30엔)이었으며 계약기간은 2년. 조선총독부는 지원자가 많지 않자 각 군별로 인원을 할당,면사무소 직원과 순사들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끌고 갔다.
한달후 3천여명이 모이자 부산의 노구치(야구양) 부대에서 훈련에 들어갔다.
포로감시를 위한 제네바협정의 내용같은 것은 일체없이 사격과 총검술 등 신병훈련과 전진훈 등 정신교육만 실시했다. 두달간의 훈련이 끝나자 이들은 태국 말레이시아 자바(인도네시아)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됐으며 뉴기니를 비롯한 남양군도에는 대만에서 교육시킨 대만인들을 배치했다.
▷태면철도◁
일본군이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태국과 버마간에 건설한 전장 4백15㎞의 철도로 42년 11월에 착공하여 43년 10월에 완공됐다. 이 공사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는 6만명을 넘었으며 조선인 감시요원도 1천여명에 이르렀다. 정글을 뚫고 암반을 깨면서 하루 1㎞ 이상 진척시키는 경이적인 속도로 진행됐으며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포로 1만3천여명,현지 노무자 수만명이 사망하는 바람에 「죽음의 철도」라고 불려졌다.
▷한국인 전범◁
한국인 전범으로 몰린 것은 포로감시요원이란 직책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한국인 감시요원들에게 포로들을 동원하여 작업감독의 일을 맡겼다. 일본군은 포로학대의 모든 책임을 한국인들에게 떠 넘기겠다는 교활한 수법을 쓴 것이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포로감시의 악역을 맡았던 한국 청년들은 「포로학대자」로 지목됐고 명령을 내린 일본 군인들은 발뺌했다.
45년 10월부터 51년 4월까지 아시아의 49개소에서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46년에는 일본에서 변호사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대만인에겐 통역조차 대주지 않아 한국인 1백48명(보호감시요원은 1백29명),대만인 1백7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한국인은 일본국적을 상실했지만 스가모 형무소로 이송돼온 한국인 전범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한국인 전범들은 인신보호법에 따라 석방을 요구했으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극동군 사령부와 협의끝에 「전쟁범죄를 범할 때와 재판을 받을 때 일본인이었으면 그뒤의 국적변경이나 상실은 형의 집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구를 물리쳤다.
스가모 감옥에 있던 A급 전범자는 56년까지 모두 석방됐으나 BC급 전범자가 마지막 가석방된 것은 58년 5월이었다.
▷동진회◁
한국인 BC급 전범과 사형자의 유족 70여명이 상호부조나 생활권의 확보 등을 목적으로 55년 4월에 결성했다. 현재 회원은 본인(35명)과 유족을 합쳐 50명. 역대총리에 대해 국가보상과 유골의 본국 송환을 요구해왔다. 일본정부는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체결 이후는 전범들의 보상도 청구권 자금속에 포함돼 있다며 한국정부에 요구하라고 외면해오고 있으며 한국정부는 해방전의 일이니 일본정부에 알아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동진회는 외국에서 사형당한 23명의 한국인 전범중 소재가 확인된 14명의 유골을 찾아 9구는 한국의 유족에게 송환했으나 나머지 5구는 유족을 찾지 못했거나 연고지가 북한이어서 도쿄의 절(지상본문사)에 안치중이다.
▷재판◁
문태복 동진회 회장을 포함한 한국인 BC급 전범 6명과 유가족 1명(한국거주) 등 7명이 91년 11월 도쿄지법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국가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대신 지고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국가가 보상해야 하고 ▲포로감시원으로서의 계약기간이 2년이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던 국가는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원고 1인당 5천만엔에서 9백99만엔을 지불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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