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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독립공적 손자가 찾아냈다/김찬흥목사 손자 김형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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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독립공적 손자가 찾아냈다/김찬흥목사 손자 김형석씨

입력
1993.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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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무성의 맞서 사료 찾기 24년/지난봄 “평양거사 주도” 판결 찾아/유공자 반열에 모시고 오늘 서훈식3·1운동 평양거사를 주도했던 독립유공자의 공적이 손자의 24년 집념으로 빛을 보게 됐다.

15일 광복절행사 서훈식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포상받게 될 김찬흥목사(43년 작고)의 손자 김형석씨(68·경기 시흥시 대야동 463의 25)는 69년부터 정부 당국의 무성의와 싸우며 사학도처럼 사료를 수집해온 끝에 독립운동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김찬흥목사는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태극기 제작,독립선언문 제작 및 배포 등을 지휘하고 남산현교회 독립선언식에서 사회를 담당했던 인물.

3·1운동 당일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그동안 자료부족으로 독립유공자 반열에 들지 못했었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막연하게 들으며 자란 김씨가 공적 밝히기에 나선 것은 69년 외사촌매형 이일범씨(작고·건국훈장 애족장 서훈)가 「신동아」 65년 3월호를 건네주면서부터. 이 잡지에는 김 목사의 3·1운동때 활동내용이 함께 참여했던 여권사의 증언을 통해 실려 있었다.

김씨는 곧바로 자료수집에 착수,할아버지 이름 석자가 들어있는 「한국독립사」 「3·1운동 비사」 등 관계자료 책자를 가까스로 입수해 정부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

77년에 「남북통일 이전까지는 올해로 독립유공자 신청접수를 마감한다」는 정부의 신문공고를 보고 김씨는 위기감을 느껴 똑같은 자료로 당시 원호처에 재신청했다.

이번에는 「거증미비」라는 회신이 왔으나 『필요자료는 당신네들이 알아서 제출해야지 우리가 일일이 가르쳐줄 이유가 없다』는 쌀쌀한 태도였다.

김씨는 59년에 사고로 오른쪽 시력을 상실한뒤 80년에 왼쪽 시력마저 잃어 10년동안 속수무책으로 자료수집은 커녕 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89년 수술로 왼쪽 시력을 되찾자 다시 자료와의 싸움을 시작,91년에 1919년 교회 회의록을 발견하고 당시 평양의 기독교인 19명이 수감됐었다는 기록을 보게 됐다.

국립도서관,국사편찬위,대법원을 헤집고 다니던 김씨는 지난 4월15일 마침내 정부 기록보존소에서 『피고 김찬흥 상고취의는 본년 3월1일 평양 남산현 교당에서 조선독립선언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본 피고를 사회자로 검거하여 평양 1·2심에서 징역…』으로 이어지는 판결문을 찾아냈다.

김씨는 『후손들에게 애국애족의 뿌리를 남겨두게 돼 기쁘다』며 두툼한 안경너머로 눈물을 흘렸다.<시흥=김병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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