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사라져 「투명한 관계」로/「공정한 경쟁」 지향 혁신 불가피금융실명제는 정경유착 차단을 제도화하는 장치다.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아예 주지도 받지도 못하게 걸러주는 튼튼한 그물이다.
실명제가 정착되고 나면 정치자금을 받는 쪽이나 주는 쪽 모두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거액의 정치자금을 밑천으로 벌어져온 소위 「금권정치」의 각종 폐해는 하루 아침에 그 물질적 기반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정치권에 비자금을 건네준 대가로 각종 특혜나 인허가상 독짐이권을 얻어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해온 기업들도 함께 된서리를 맞는다.
해방이후 우리 경제의 실상은 순수한 기업활동보다 든든한 권력의 줄을 잡아 「뒷거래」나 잘하는 기업인이 오히려 더 승승장구하는 풍토였다.
기업인이 본연의 경제활동에 충실하기 보다 권력의 향배나 정치풍향에 더 신경써야 하는 분위기에선 결코 진정한 「자본주의」가 꽃필 수 없다.
실명제는 경제와 정치의 관계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만들어 경제가 순수 경제논리에 따라 굴러가게 만드는 토대가 될 수 있다. 경영합리화나 원가절감,기술개발 등을 통해 공정한 경쟁을 펼치도록 「기업문화」의 일대변화를 몰고올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지난 6개월간 대부분 국내 기업인들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급작스러운 정치풍향 변화를 맞아 더 많은 자금을 비상용으로 쌓아두는 방향으로 대처해왔다.
정부 출범이후 몇개월만에 은행의 기업 금전신탁 규모가 수조원 이상 급증한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실명제 전격실시이후 대기업 자금관계자들이 즉시 긴급회의를 열어 가명 또는 차명계좌에 묻어둔 비자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고심중이다.
모그룹의 자금관계자는 『비자금으로 쓸 돈을 아예 만들거나 모아둘 방법조차 차단해 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고 실토했다.
전경련은 17일 긴급 회장단회의를 열어 실명제 이후 재계의 공동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중소기업 지원시책 등을 화답차원에서 마련할 계획이라지만 내심 정치권과의 관계재정립을 포함,실명제로 발등에 닥친 기업활동 여건변화에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아울러 정치권도 공개적 자금 한도내에서만 정당활동이나 선거를 치러내도록 정치개혁이 강요될 것이다. 음성적 정치자금의 유입이 봉쇄된 상황을 맞아 당장 여야 각 정당에선 정치자금법 선거법 예산회계법 등 관련 법률개정이 거론되고 있다. 금전살포나 조직에 의존하는 선거풍토,자금동원력에 좌우되던 계보관리가 하나같이 어려워지자 국고보조 확대나 후원회 활성화 방안 등 양성화된 자금조달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풍토 쇄신이 정치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그것도 심각하게 제기하게 몰고간 사실은 실명제의 위력을 잘 말해준다.
사실 실명제가 정치풍토나 기업문화 개선을 완벽하게 보장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실명제를 시행중인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도 여전히 뇌물수수 등을 통한 음성적 정경유착이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진국의 정경유착은 기껏해야 영향력 행사나 로비차원을 넘지 못한다. 하루아침에 재벌이 해체되거나 기업이 통째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부실경영에 허덕이던 기업에 긴급 구제금융이 주어지는 등 경제논리를 벗어나는 상황은 적어도 실명제가 시행중인 나라에선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적어도 근로자나 기업,가진 자와 못가진 자 모두에게 「콩 심은데 콩 난다」는 기본원리가 공평히 적용되도록 실명제가 보장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경제의 당면 현안인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근로자나 기업인 모두가 경제에만 몰두하게 촉구하기 위해서도 실명제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유석기기자>유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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