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한 「동료전범」 넋 위로 명예회복 다짐『한국인 전범들은 일본을 위해 희생하고도 일본으로부터 버림받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한게 없으니 조국에는 할말이 없습니다』
한국인 BC급 전범들의 친목단체인 동진회의 문태복회장(70)은 8·15 광복 48주년을 눈앞에 둔 12일 자신들이 처한 입장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전국민이 기뻐하는 조국광복의 날이 다가오면 기쁜 마음보다는 서글픔이 앞선다』고 말했다.
문씨가 포로감시요원이 된 것은 19세때인 42년 6월. 도쿄의 금성중학을 졸업한후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그가 41년 12월8일 일본 열도 전체가 들끊자 고향(전남 구례)에 돌아와 부친이 경영하던 양조장일을 돕고 있을 때였다.
일본인 경찰서장이 찾아와 장남인 문씨를 지목하며 『2년간만 포로감시요원으로 갔다오라』고 권했다. 형식은 권유였으나 당시 식량배급제가 실시되고 있을 때여서 그의 지시를 거절했다가는 당장 가업마저 걷어치워야할게 분명해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동남아시아로 간 나는 태면철도 공사장에 배치됐는데 일본 군인들이 영국군 포로들을 작업장에 동원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포로들은 내가 자신들을 학대했다고 고발했기때문에 전범으로 몰리게 됐습니다』
문씨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싱가포르 장기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당시 영국군 포로중 최상급자였던 모중령이 문씨를 고소치 않은 점을 이상히 여긴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 지구사령관이 관련서류를 재검토한후 『10년 이하로 감형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목숨을 건지게 됐다.
문씨는 51년 스가모(소압) 형무소로 이감됐다가 형기의 4분의 3을 복역한후 모범수로 52년 4월 가석방됐다.
문씨는 한국인 전범중 일부가 돌아가기도 했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들 가운데 일부가 자식의 전범처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대부분이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렇게 일본땅에 남은 대부분의 한국인 전범들은 날품팔이로 근근이 연명했습니다. 생활은 말이 아니어서 생계보호대상자가 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죠. 견디다못해 역대 총리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지금까지 보상투쟁을 벌이고 있으나 보상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문씨는 80년대들어 한국정부에도 협조를 요청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전두환 노태우대통령 시절때 도움을 청했지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로서도 본국 정부에는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일본정부와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자민당 정권때보다는 현재의 연립정권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정권이 언제 바뀔지 몰라 불안합니다』
문씨는 사회당 의원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문제를 국회에서 거론하는 등 협조적이었다면서 특히 동진회 후원멤버인 도이(토정) 전 사회당 위원장이 중의원 의장이 된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91년 국가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현재 공판이 진행중입니다. 일본정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일본정부가 책임을 지도록 전후처리를 꼭 관철시키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문씨는 자신이 눈을 감기전 보상청구소송에서 승리,한을 품은채 타계한 한국인 동료 전범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는 집념을 갖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도쿄=이재무특파원>도쿄=이재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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