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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수명42년 43세­90년 71세/통계로본 광복전후 경제·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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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수명42년 43세­90년 71세/통계로본 광복전후 경제·사회상

입력
1993.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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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도 수출품주종 오징어·김/47년엔 25명당 운동화 1켤레/44년 인구 2천5백92만… 폐렴사망 최고반세기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이 약 27세 늘었다. 경제상황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다. 산업생산 수출입구조 등에서 개벽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났다.

통계청이 12일 발표한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에 따르면 48년의 수출은 마른 오징어(수출비중 38.4%) 김(14.6%) 한천(6.3%) 약재(3.8%) 등 농수산품이 대종을 이루었다. 지난해의 수출 주종품은 반도체(8.9%) 선박(5.4%) 철강(4.1%) 자동차(3.7%)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다. 수출구조가 반세기만에 후진국형에서 선진국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경제상태를 반영하는 물가는 광복전후 천정부지로 올라 44∼48년 4년동안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만7천7백38%에 달했다. 88∼92년 4년동안의 물가상승률(33.3%)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48년 당시 금 1돈쭝을 팔면 쌀 4말을 살 수 있었다. 지금(지난 5월 기준)은 금 1돈쭝을 팔아야 쌀 1.9말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또 당시 회사원(사무직)의 월급은 9천40원으로 겨우 쌀 5말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여공의 월급은 3천5백59원으로 보리쌀 1말(1천3백4원)과 밀가루 1포대(2천2백46원)를 사고나면 당시 왕복전차료(10원)에 못미치는 9원이 남았을 뿐이다. 지금의 회사원은 한달치 월급으로 쌀 38.8말을 살 수 있다. 특히 당시의 서울­부산간 비행기요금(편도)은 1만1천원으로 회사원이나 은행원(8천3백90원) 월급보다도 많다. 한달치 봉급을 다 털어도 서울에서 부산가는 항공권 한장 살 수 없었던 셈이다. 지금은 회사원 한달치 봉급(92만4천원)으로 서울­부산 비행기표(3만7천2백원)를 약 25장 살 수 있다.

경제발전은 의료서비스를 크게 개선시켰다. 평균 수명이 38∼42년의 43.8세(남자 42.5세,여자 45세)에서 90년 71.3세(남자 67.4세,여자 75.4세)로 27.5세 늘었다. 사망원인을 보면 보건서비스의 개선상을 확연히 볼 수 있다. 47년의 주요 사망원인은 폐렴(12.6%) 유아병(12.0%) 위·십이지장염(9.9%) 등이다. 지금 같아서는 병같지 않은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다. 반면 91년의 경우 각종 암이 19.2%로 가장 많고 노쇠(10.3%) 교통사고(7.0%) 등의 순이다. 불치병인 암에 걸리지 않고 교통사고만 안 당하면 장수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교육면에서 있어서는 광복당시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77.1%가 학교교육을 전혀 못받는 불취학자였다. 이 결과 13세 이상 인구 가운데 한글을 전혀 읽거나 쓸 수 없는 까막눈이 7백98만1천명으로 77.0%(45년 8월기준)에 달했다.

지금은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전화기나 자동차도 당시에는 희귀했다. 등록자동차수가 48년말 1만4천7백8대에서 지난 4월말 현재 5백56만4천5백대로 3백78배 늘었다. 총 전화가입자수는 45년 4만4천명에서 92년말 1천5백59만3천명으로 인구 1천명당 전화가입자수는 2.6명에서 3백57.1명으로 크게 늘었다.

산업면에서는 종업원 5인이상의 공장이 46년 11월 5천2백49개로 91년말 7만2천2백13개의 7.2%에 불과하다. 광복당시 남한의 공업생산 시설은 불모지대와 다름 없었다. 46년 7월과 47년말까지 18개월간의 주요 생필품의 생산량을 보면 면포의 경우 인구 1인당 1마수준이었고 양말과 고무신이 각각 8명당 1켤레 꼴이었다. 운동화는 25명당 1켤레,비누도 3명당 1개 수준이었다.

광복당시 남한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었다. 46년 남한의 총발전량은 2억2천4백만㎾/h에 불과했고 북한으로부터 4억6천5백만㎾/h의 전력을 받아 총 6억8천9백만㎾/h를 공급했다. 그러나 북한이 48년 5월 일방적인 단전조치를 단행,전력난이 악화됐다. 92년의 총 발전량은 1천3백9억6천3백만㎾/h나 된다.

문화면에서는 48년당시 라디오 청취자수가 총인구의 0.7%에 불과한 15만9백1명으로 1개월간의 청취료는 1백원이었다. 지금은 시골농촌이나 도시 달농네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TV가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간 신문수는 48년 54개에서 92년 1백개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정치사회적 혼란도 극에 달했다. 산업생산이 불모지대나 다름 없었는데도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좌우익이 대립한 이데올로기투쟁이 쟁의를 부추겼다. 46년의 경우 1백70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참가인원이 5만7천4백34명,노동손실 연일수가 23만5천일에 달했다.<이백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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