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교」 난관… 유족들 호소 수십년 좌절/지난 5월 중 외교부장 방한 계기로 결실박은식선생 등 임시정부 선열 5위 유해반환은 다섯분이 이역에서 겪어야 했던 설움과 고통만큼 갖은 우여곡절끝에 이루어졌다.
유해봉환과 성사는 한중수교라는 정치적 차원의 현안해결이 큰 힘이 됐지만 그 이전에 유족들의 끈질긴 집념과 호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번에 유해가 봉환된 박은식선생의 아들인 박시창 전 광복회장(86년 작고)은 해방후부터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중국에 있는 임정요인의 유해봉환을 위해 애써왔지만 비수교국이라는 외교적인 난관 때문에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신규식선생 외손자로 대만공사를 지낸 민영수씨와 손녀사위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도 묘소를 확인한뒤 90년 중국으로부터 유해봉환을 비공식으로 허락받았으나 개인자격으로 들여오는 것보다 조금 늦더라도 당당하게 봉한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김 전 총장은 81년부터 8차례나 송경령릉원(전 만국공묘)을 방문한 끝에 88년에 신규식선생의 묘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같은 유족들의 끈질긴 집념에도 불구하고 유해봉환은 미수교라는 벽에 부닥쳐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보훈처도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중국의 홍십자에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유해봉환을 호소해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중 지난해 8월24일 양국간에 국교가 수립됐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유해봉환을 적극 추진했으나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국교수립후 중국에 대사관을 설치한뒤 우리 정부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올해초까지 중국측은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답변을 해오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문민정부 출범후 중국측의 자세도 달라져 『신규식선생을 제외한 4위의 유해가 확인됐다』는 응답이 왔고 5월말에는 『5위의 유해가 모두 확인됐으니 봉환문제를 검토해 보자』는 제의가 왔다.
수교후에도 이처럼 시간을 끌던 유해반환이 이루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5월27일 방한한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을 김영삼대통령이 접견한 자리에서였다.
하루 전날인 26일에는 김 전 고대 총장이 한승주 외무부장관과 함께 전 외교부장을 만나 유해봉환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한바 있었다.
전 부장은 우리 정부에 적극 협조를 약속했고 6월3일 유해봉환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통고해왔다.
정부는 이에따라 6월15일 관계부처 회의를 열어 유해봉환 집행위원회를 구성했으며 23일에는 황인성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전위원회를 구성하고 봉환행사를 천묘식 봉영식 영결식 안장식으로 나눠 치른다는 제전계획을 의결했다.
전제위는 7월29일 실무협의를 위해 장귀호 국가보훈처 보상지원국장을 반장으로 하는 실무협의반을 중국에 파견,장례절차 등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상해=이충재기자>상해=이충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