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준비작업… 89년 조직위 출범/“경험부족” 한때 비공인 개최 의견/90년 BIE서 승인… 91년 기공식앞으로 3개월간 인간과 자연,첨단과학과 예술이 만나 21세기를 향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주고 한국경제에 제2도약의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대전엑스포는 88년부터 준비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88서울올림픽으로 고양된 국민들의 역량을 한차원 높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흡수하는 방안으로 엑스포 개최를 검토했다. 그래서 그해 9월 엑스포 개최 실무기획단이 구성됐다.
5개월후인 89년 2월14일 정부는 마침내 엑스포를 열기로 확정,발표하고 그 장소를 지역균형발전을 고려해 중부 거점 도시인 대전으로 정했다.
대전엑스포 개최가 공식화되자 준비작업의 행보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3월6일에는 국제엑스포(현재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가 상공부의 승인을 받아 재단법인으로 출범했고 12개 관련부처와 공공기관에서 1백32명의 요원이 파견됐다.
그러나 당초 의욕에 비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엑스포 참가 경험이 없어 사업계획 수립은 벽에 부딪쳤다. 조직위는 고심끝에 91년 8월 현 도룡지구에서 비공인으로 개최키로 의견을 모았다.
이 계획조차 시기적으로 촉박했고 당시 경제사정을 감안,정부는 89년 8월30일 국회의 요구에 따라 93년으로 연기했다. 조직위도 그해 11월7일 취임한 오명위원장의 주도로 기본계획을 수정해 개최시기는 93년 8월7일부터 3개월로,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로 정하고 이듬해 8월 위원총회를 통해 확정지었다.
이어 9월27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 지원위원회가 대전엑스포에 대한 국고지원 등 종합대책을 세우자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국제박람회기구(BIE)는 9월19일 파리에서 열린 1백8차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대전엑스포를 공식 승인했다.
정부도 91년 1월 엑스포 지원법을 대전 세계엑스포 지원법으로 개정해 의욕적인 자세로 지원을 가속화했고 4월12일 대전엑스포가 치러질 도룡지구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조직위는 총 27만3천평의 엑스포 행사장을 상설전시구역(7만6천2백평) 국제전시구역(7만5천4백평) 지원시설구역(12만1천4백평)으로 나누어 전시관 및 부대시설 건설을 시작했고 공식마스콧인 꿈돌이를 내세워 세계에 대전엑스포를 선전했다.
행사에 따른 편의시설을 위해 91년 11월에 총 51개동 3천9백58세대의 엑스포타운 건설,행사장 주변인 갑천 우안도로 건설을 시작했고 갑천을 가로지르는 3개의 교량 축조공사도 함께 벌였다.
외국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으로 조직위는 92년 3월3일과 10월20일 서울서 정부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대전엑스포의 홍보에도 주력,그해 5월에 이미 참가를 공식 통보한 국가가 1백여국에 이르렀고 24개 국제기구도 참여의사를 전해와 사상 최대규모를 예견케 했다.
지난 5월말 전시관 건축공사를 완료한 조직위는 7월말까지 전시관별로 일부 외국 참가국들을 제외하고는 개장준비를 완료,1일 종합 리허설까지 끝냈다.
6일 개회식날 한빛탑에 불이 켜지고 7일 공식 개막테이프를 끊으면서 세계의 문명기술 인간이 만나는 「경제과학 올림픽」 대전엑스포의 막은 오른다.<대전=엑스포 특별취재단>대전=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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