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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개혁」 못다 펴시고…/고 장강재회장 영전에(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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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개혁」 못다 펴시고…/고 장강재회장 영전에(추도사)

입력
1993.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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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의 서거를 충심으로 애통하게 생각합니다. 얼마전 장 회장이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회복을 기원하고 있던 중이어서 서거의 소식에 놀라움과 슬픔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특히 장 회장은 한국 언론계의 젊은 지도자로서 한창 활약하고 있던 중이니,40대의 젊음으로 서거한 일이 더욱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32년만에 「문민시대」가 도래해 언론계의 역할이 전에 없이 중요하게 된 지금,장 회장의 서거는 언론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 회장은 「독자본위의 신문」을 모토로 전국동시인쇄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 최신 뉴스가 만재된 신문을 배달할수 있게 하는 등 신문개혁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던 때이니만큼,뜻을 못다이룬 그의 흉중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한국일보와 요미우리(독매) 신문과의 관계는 1960년 5월,한국이 전후처음으로 일본인 특파원을 받아들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장 회장의 선친인 당시의 장기영사주가 요미우리 특파원에게 취재차량을 제공하는 등 특별한 협력을 베풀어 줌으로써 60년 10월 양사는 정식으로 제휴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배경에는 장 사주와 본지의 고 쇼리키 마쓰타로(정력송태랑) 사주와의 친교가 있었습니다. 장 사주와 쇼리키사주는 간담을 서로 터놓는 사이로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일본과 한국 각각의 입장에서 신문계의 발전에 진력했습니다.

장강재회장은 선친의 뒤를 이어 20대의 젊음으로 사장에 취임했고,새 회장시대가 되어서는 본지와의 관계도 더욱 깊어지게 됐습니다. 양사의 관계는 일한관계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 발전했고 교류도 많아져 한국일보의 도움을 입은 요미우리인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때는 본지가 서울에서 「독매신문 오륜위성판」을 발행하는데에 한국일보가 인쇄에서부터 배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협력해 주었습니다

오륜위성판은 도쿄에서 제작한 지면을 통신위성으로 서울에 보내 현지에서 앤쇄하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도였습니다.

한국일보의 간부진여러분은 장 회장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의 프라이드를 걸고」 철야작업을 해주었고 위성판은 일본인관람객과 선수단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나는 이 보고를 받고 장기영사주로부터 장강재회장으로 이어진 「한국일보 정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올림픽 때 양사는 동시에 새롭게 제휴관계를 강화하기로 약속,기사나 사진의 교환,취재협력관계만이 아니라 문화사업 등 다방면에 걸쳐 협력을 충실히 하기로 했습니다. 약속은 그후 만화박람회의 서울개최 등 여러가지 결실을 맺었습니다. 장 회장의 최근 2,3년간의 활약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앞에 말한 전국동시인쇄외에 한국의 다른 신문을 앞질러 조석간체제를 약 30년만에 부활시켰고 나아가 월요일자 신문을 발행,휴일없는 신문 체제를 선도했습니다. 모토인 「독자본위의 신문」의 실천이었습니다.

회장이 신문인으로서의 강한 사명감으로 선두를 선 이같은 결단에,같은 신문인으로서 존경의 념을 품고있습니다. 장 회장은 21세기의 신문을 위해 이외에도 여러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회장 자신의 손으로 이 일들이 실현될 수 없게된데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장 회장이 20년동안 벌여온 사업,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일보정신은 틀림없이 사원 전원에게 계승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일보사가 장 회장이 쌓은 확고한 토대위에 더욱더욱 발전할 것을 확신합니다. 장 회장의 이제까지의 우의에 감사를 바치며 충심으로 명복을 기원합니다.<도변환웅=독매신문사장>

◎48년은 너무 짧습니다/고 장강재회장 영전에(추도사)

월요일 새벽의 믿기지 않는 비보를 듣고 큰 놀람과 심한 비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장 회장의 서거는 정말이지 충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48년의 짧은 생애….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내 머리를 때리고 또 때립니다. 48년은 너무 짧습니다. 비록 시정의 필부일지라도 48년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물며 할일이 태산처럼 많은 장 회장의 경우야 그 아쉬움을 어찌 필설로 형언할수 있단 말입니까.

서른을 갓덤긴 젊은 나이로 선친의 위업을 물려받은 이래 장 회장은 정말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원숙한 중년으로서의 사회의 듬직한 향도역을 수행하던중 당신은 너무도 아쉬운 작별을 우리에게 고하고 말았습니다

타고난 귀공자의 풍모를 지녔던 당신은 언제나 바위처럼 과묵하였지만 그 침묵은 항상 지혜에 닿아 있었습니다. 단아한 당신의 얼굴에서 늘 우리는 사라져가는 선비의 체취를 느끼곤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고 다투어 나서지 않고,양보와 겸양으로 일관하는 당신의 처세를 통해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어쩌다 둘이 만나서 밥 한끼를 먹게 될 때면 우린 서로 상석을 양보하느라 얼머나 실랑이를 벌였던가요.

지난 88년 서울경제를 복간하게 되자 제일먼저 내게 그 기쁨을 전하면서 즐거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장 회장,당신은 참으로 인정이 봄날의 강물처럼 넘쳐 흐르는 분이었습니다. 친구든 부하직원이든 집안식구든 그 누구든 어려운일을 당하고 있으면 상대방이 도와달라는 얘기가 나오기도전에 소문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곤 했습니다.

인정이 너무 지나쳐 회사경영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이 회사 일각에서 일고 있을때도 당신은 미소로 일관할뿐 스스로 단 한사람의 사원도 신문사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설혹 잘못을 저지르는 사원이 있다손 치더러도 그 사원을 선발하고 가르친 경영자의 책임이 더 큰법이라며 모든 것을 자신의 부덕으로 돌리던 당신의 그 대덕을 이제 우리는 전설처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경영을 책임진 이래 매일 아침 7시28분이면 어김없이 출근용 엘리베이터앞에 섰던 당신,그래서 한국일보 사람들은 회장의 출근시간을 보고 잘못된 시계바늘을 고치기도 했다지 않습니까. 그 근면성과 성실함을 이제 우리 다시 볼수 없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장 회장,당신은 일요일에도 신문을 만들어 신문없는 날을 없애는 언론사상 획기적인 이노베이션을 창안한데 이어 조석간 동시발행을 통해 한국일보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주창한 사랑의 쌀보내기 운동은 지구촌 곳곳의 기아에 허덕이는 많은 생명들을 구하는 기적을 낳으면서,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신은 미아찾기 운동,훌륭한 선생님 발굴운동 등을 통해 보다 밝은 세상,보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촛불이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듯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태워 이 땅 밝히기를 자임해왔습니다. 당신은 이 시대의 촛불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당신을 만날수 없음을 크게 슬퍼하면서,당신의 큰 덕과 훌륭한 인품과 생전의 유지를 두고두고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장 회장!

부디 영면하시고 편안한 잠을 주무시길 기도합니다. 너무나 짧은세월,못다산 몫일랑 생전의 당신의 인품에 비워볼 때 남은 가족들에게 후하게 남겨두고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잘 가소서,장 회장…. 나를 알아주던 진실한 친구하나를 잃은 슬픔 가눌길 없습니다.★석간재록<김우중=대우그룹회장>

◎장강재회장 명복빕니다

지난 2일 한 위대한 한국인이 한창 일한 인생의 황금기에 아쉽게도 별세했습니다. 고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은 선친이 이룩한 위업의 발자취를 좇아 거대한 신문제국을 건설했고 전 임직원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국일보를 세계 유수 언론사와 어깨를 겨룰만한 수준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본인은 고인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고인이 출중함을 보였던 점은 타고난 지성이나 일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인은 선친 백상 장기영선생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던 까닭에 그의 의지를 훌륭히 받들어 오늘날 일취월장의 한국일보를 가꿔낼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상은 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전에 본인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이번에 고인의 부음을 접하고나니 지난 88년 서울올림픽때와 최근 한국방문때 고인과 함께 경기도 검단산의 백상묘역을 찾아 분향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갔습니다. 생전에 존경했던 선친곁에 누워 영원한 안식을 취할 것입니다. 고인의 가족과 친지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인의 뒤를이을 후계자는 고인과 백상이 한국언론계에 남겨놓은 위대한 업적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한국일보와 그 자매 매체들은 그들의 나라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

◎“한국언론 선구자/장 회장 기억될 것”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전 사원과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 회원들을 대신해 고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의 영전에 삼가 조의와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우리는 IPI의 소중한 회원이자 한국언론의 선구자였던 고인을 영원히 추모할 것입니다.<데이비드 레벤덜la타임스 발행인 ipi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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