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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재회장의 고별사(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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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재회장의 고별사(장명수 칼럼)

입력
1993.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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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가족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장기영사주는 38세에 한국일보를 창간했는데,나의 38세는 이게 뭐냐』

우리가 창업주 아닌 장강재회장의 나이를 생각한것은 지난봄 그가 발병한 이후였다. 77년 장기영사주가 별세했을때 장남인 장강재회장은 33세였다. 우리는 그가 33세에 한국일보·코리아 타임스·서울경제·일간스포츠·소년한국일보 등 5개 신문을 이끌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 어려운 정치상황속에서 5개 신문을 끌고가야 했던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간암에 걸린것도 결국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라고 한국일보 가족들은 「38세의 창업」이 아닌 「33세의 수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장기영사주가 신문을 창업하여 키워나갔던 23년도 파란만장 했지만,장강재회장이 신문을 이끌어간 17년도 아버지의 세월 못지않았다. 평기자로 살아남기도 힘들던 혹독한 시절,그는 언론사주로 신문과 함께 살아남아야 했다.

1980년 신군부는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당시 최고의 경제전문지였던 서울경제를 폐간시켰다. 신문사 하나쯤 손쉽게 문닫아 버릴 수 있는 군사정권아래 아버지가 창간한 신문 하나를 이미 잃어버린 그의 위기감과 갈등이 어느 정도였을지,우리는 회장이 암으로 신음할때 겨우 헤아리게 됐다.

지난 4월 이후 그는 암과 싸우면서 몸이 버티는한 신문사에 출근했다. 그는 항암치료로 지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채 편집국에도 내려오고,창간 39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하고,이사회도 주재했다. 그는 6월30일 이사회에서 『정직한 신문을 만들자. 눈앞의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멀리 바라보며 진실을 보도하자』고 말했다. 그날 그는 눈물을 머금었고,그말은 한국일보에 남긴 유언이었다. 「정직한 신문론」은 그가 병과 싸우며 오랫동안 생각을 가다듬어 메모한 것이었다.

『나는 병석에서 신문이 그동안 얼마나 진실에 충실했던가라는 자괴심을 느꼈다. 기자들은 신문이 진실을 외면하거나 허위·과장 보도를 함으로써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기사를 써야 한다. 피해자와 약자의 입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문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서 남의 거짓말을 탓할 수는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장기영사주는 언론·경제·체육·정계를 폭넓게 섭렵한 당대의 「거목」이었다. 기지가 번뜩이는 아버지의 어록을 신문사 곳곳에 내걸고 장강재회장은 충실한 「거목의 아들」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수성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월요 휴간제 폐지,전국 동시인쇄,조·석간 발행 등을 앞장서 치고 나가며 그 아버지의 아들답게 한국 신문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뜨끈뜨끈한 신문이 인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새벽의 아름다움을 못잊는 영원한 신문인이었다. 오늘 한국일보는 지난 67년 입사한이래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부지런한 사원으로 일했던 장강재회장의 영결식을 치르고,그를 떠나 보낸다. 그리고 우리가 끌어안은 것은 그가 남긴 고별사이다. 짧았던 생을 열정적으로 신문에 바쳤던 한 언론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뇌했던 「신문과 진실과 정직성」은 이제 그가 주고간 우리의 몫이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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