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없어 사무실 옮기며 소송/5공 청문회때 희망의 싹/잇단 패소에 동료들 떠나기도85년 해체당할 당시 국제그룹은 종업원 3만8천8백여명에 연간 매출액이 1조7천9백억원(84년말 기준)에 달하는 국내 7위의 대재벌이었다. 헌법재판소의 국제그룹 해체 위헌결정을 이끌어낸 국제그룹 복권추진위원회는 직원 6명이 보증금 4천5백만원 월세 5백50만원인 80평짜리 사무실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이 골리앗이었다면 8년만에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복권위는 다윗에 비유될 수 있다. 복권위의 고난에 찬 과거와 앞으로의 대응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재계의 일대 재편을 몰고올 수도 있는 「태풍의 눈」 복권위는 결성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찻잔속의 태풍」 정도로 비쳐졌다. 6·29 선언으로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던 87년 10월 국제그룹 공채 1∼2기 중심의 「국사회」가 회비를 걷어 여의도 동부빌딩에 국제그룹 복권추진위원회 사무실을 낸 것이 국제그룹 복권활동의 시작이었다. 3년여동안의 숨죽임끝에 복권위가 한 첫번째 작업은 88년 4월 한일합섬을 상대로 한 양정모 전 회장 소유 국제상사 주식(59억원)의 반환청구 소송이었다. 복권위 관계자들은 당시만해도 그룹재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기보다는 혹시나하는 심정으로 소송을 제기했었다고 말한다.
4·26총선으로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되고 5공 청산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할 때인 88년 9월 복권위는 현재 복권위 전무를 맡고 있는 김상준씨가 본부장이 되면서 재편됐고 양 전 회장의 장남 희원씨도 86년부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 한달뒤 국회 재무위 국정감사가 시작됐고 뒤이어 5공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국제그룹 해체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복권추진위는 희망을 품고 89년 2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런데 90년 11월 업무상 배임교사 및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김만제 전 재무장관이 검찰에 의해 무혐의 불기소처분을 받자 복권추진위는 헌법소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 수 밖에 없게 됐다.
복권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여러가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나타났다. 국제그룹 복권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호구지책을 찾아 흩어지고,여의도 사무실 문을 닫으면서 옮긴 30평짜리 광화문 동원빌딩 사무실 임대비용도 양 전 회장이 충당할 수 없어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국제그룹 해체당시 부회장이었던 다섯째 사위 김덕영씨(현 두양그룹 대표)마저 그룹재건의 가능성에 회의를 품고 복권위를 떠나자 절망감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커갔다. 91년 12월에는 주식반환 청구소송 1심에서마저 패해 복권위는 친목단체 성격의 모임으로 변해 갔다.
이 시련의 시기에 복권위를 지탱시킨 것은 국제그룹 경영시 두번의 화마를 겪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선 양 전 회장의 기업인으로서의 명예회복 의지와 산산조각난 자신의 옛 직장을 기필코 되찾겠다는 김상준전무의 집념,부친의 뜻을 좇아 그룹을 재건하겠다고 동분서주한 장남 희원씨의 노력 등이었다. 또한 쥐꼬리만한 돈을 받으면서도 그룹복권에 열성을 보인 국제그룹 전 직원들의 희생도 큰 힘이 됐으며 아직도 직·간접적 유대를 맺고 있는 국제그룹 공채 1∼5기 출신들의 유·무형의 지원도 격려가 됐다.
앞으로의 활동의 관련,복권위는 일단 헌법재판소 결정의 정확한 의미와 법적 효과를 파악한 후 다각도의 대응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소송이 아닌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복권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국제그룹 인수사들에 대해 인수해간 기업을 돌려주라고 「공개적으로 권고」하는 것도 가능한 방법중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윤순환기자>윤순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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