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이후 산업합리화에 초점/5공때만 무려 57개사헌법재판소의 국제그룹 해제에 대한 위헌결정을 계기로 부실기업 정리문제가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부실기업 정리는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무리한 투자,이에 따른 은행의 부실화 등 국민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해 원칙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지만 대상기업 선정과 인수기업에 대한 엄청난 특혜 등으로 결국 재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와 「정치성이 짙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었다.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67년말. 정부가 지불을 보증한 차관기업중 상당수가 부실화됐고 69년에 이르러서는 성장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이해 2월말 산업은행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부실기업에 대한 정비를 지시했고 5월에는 청와대에 외자관리 비서실이 설치됐다. 총책에는 김학렬 수석비서관,담당비서관겸 반장은 장덕진 재무부 이재국장이 임명됐다. 당시 7차례에 걸쳐 정리된 부실기업은 30개였으며 이중에는 최대 수출기업이었던 천우사와 화신,조선공사 등이 포함됐었다.
그후 70년대 후반까지는 율산이나 제세산업 등 일부 기업에 대한 산발적인 정리가 진행됐으나 79∼80년 중화학투자 조정작업이 대두되면서 산업합리화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70년대 중반이후 본격화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과잉·중복투자가 이루어진데다 석유위기까지 겹쳐 관련기업의 부실이 심화됐다. 당시 부실정리는 업계의 자율조정을 원칙으로 했지만 극심한 이해대립으로 5공에 들어 국보위의 직권조정으로 정리됐다.
84년 5월 63개 해운회사를 17개로 통합시킨 해운산업 통폐합조치를 시행한 정부는 부실기업정리의 하이라이트인 57개 기업에 대한 정리에 착수했다. 86년 2월 김만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위원장이 된 산업정책심의위원회는 산업구조 조정 및 부실기업 정리를 위한 지원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리대상이 된 기업들은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으며 인수기업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으로 밝혀져 큰 파문이 잇달아 계속됐다.
정리의 첫 작품은 86년 5월의 대한중기와 풍만제지를 기아와 계성에 인수시킨 것이었다. 2차 정리는 삼호와 이번에 위헌판결이 내려진 국제그룹의 일부가 대상이었고 3차는 85년 2월에 이미 해체된 국제그룹 계열사였다.
부실기업 정리가 본격화된 것은 이해 9월22일에 실시돼 28개사가 정리된 4차였다. 국제상사 등 국제계열사 7개와 남광토건·동양고속 등이 대상이었다. 이때 인수기업들은 한일합섬과 동국제강·우성·대우·쌍용·한국화약 등 24개사였다. 모두 현재 재계 서열 상위권에 있는 그룹들이다.<이상호기자>이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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