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현장서 위기 깨우쳐라”/「스파이사건」 “도덕불감증” 질타/참석자들 팽팽한 눈빛엔 변신의지 역력【후쿠오카=홍선근특파원】 날이 희부옇게 밝기 시작한 30일 새벽 6시…. 후쿠오카 뉴오타니호텔 4층 대회의실을 나서고 있는 삼성그룹 사장들의 얼굴은 초췌하고 피로한 기색들이 역력하다. 29일 밤 10시20분께부터 장장 7시간40분 동안 계속된 철야회의에 완전히 녹초가 된 모습들이다. 그러나 쏘는듯한 눈빛들에 표정은 하나같이 날카로워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다.
이날의 후쿠오카 현지회의는 이건희회장 주재로 열린 열여섯번째 해외 현지회의. 지난 6개월여 동안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 계속 열렸던 다른 현지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도 못했던 「무시무시한」 질책들이 밤새 퍼부어졌다. 낡은 것을 깨기위한 야단과 질책,새로운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격려와 훈화들로 밤을 새운 회의였다. 삼성의 변신을 위한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재계에 신풍을 일으키면서 삼성은 「21세기를 향한 대장정」의 격랑속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룹 총수인 이건희회장의 진두지휘로 시작된 이 대장정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는 자기반성과 위기의식을 밑바닥에 깔고 일차적으로 15만명 삼성그룹 구성원들의 머리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로부터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삼성의 경영스타일,삼성의 기업풍토와 기업문화,삼성맨들의 의식구조,경영이념 경영조직 등 모든 것을 다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2∼3년안에 현재의 기업경영 방식을 다 뜯어고치지 못하면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은 고사하고 2류기업으로 현상유지도 못한채 3류,4류기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회장 스스로가 강조하는 위기의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삼성그룹은 2월부터 이 회장의 경영혁신 지론과 소신을 우선 8백여명의 삼성계열사 임원들에게 직접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에서 해외회의를 6개월여동안 연속적으로 갖고있다. 진열장에서 밀려나고 있는 우리상품의 실상,날로 더 뒤떨어지고 추락하는 우리 경쟁력을 실태,우리 경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위기의 현장」에서 삼성 임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깨우치면서 낡은 사고의 틀을 깨치는 것이 해외 현지회의의 취지다. 이 회장은 87년말 회장에 취임,최근까지 만 5년여에 걸쳐 「양을 제로로 무시한 1백%의 질적 경영」 등 경영혁신 내용을 계속 강조해 왔으나 도무지 반향이 없어 해외 현지회의라는 독특한 방법을 동원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날 후쿠오카 회의는 때마침 돌출한 스파이사건 때문에 예정보다 약 20분 늦게 시작됐다. 이 회장은 질 위주 경영의 의미를 묻는 한 임원의 첫 질문에 『실적을 위한 실적은 다 없애고 싼값을 들여 좋은 물건을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새로운 경영에 인간미와 도덕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이 회장은 삼성전자 직원의 금성사 창원공장 침입사건을 거론하며 『도덕적 불감증의 전형적인 예』라고 호되게 질책했다. 이 회장은 『돈을 주고 외국의 선진기술을 사오라고 해도 사오지 않고 일본인 기술고문을 데려다놓고 기술을 배우라고 해도 배우지 않고 왜 이처럼 엉터리 짓을 하느냐. 지금이 어느 때냐. 질적으로 바뀌어 올바른 길로 가자고 회장이 직접 나서서 24시간을 뛰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하고 가전담당 부사장부터 당사자에 이르기까지 책임자들을 모두 징계하겠다고 즉석에서 밝혔다. 일단 징계를 하고 철저한 재교육을 통해 나중에 기회를 다시 한번 주겠다고 이 회장은 덧붙였다.
이날 간담회는 일단 새벽 1시40분까지 3시간20분동안 계속됐다. 간담회가 끝나 일부 참석자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후 사장단 등 20여명은 다시 이 회장방에서 2차모임을 가졌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 사건을 또 집중거론,『이번 사건이 잘 터졌다. 그냥 지나갔으면 나한테는 더 문제였을 것이다. 다만 임시처방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책을 만들라』고 주문하고 참석자들의 논의를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양위주의 경영이 이러한 사태를 낳게됐다고 진단하고 위에서 경쟁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를 바꾸는 문제 등 갖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이 회의는 닐이 다 밝은 상오 6시가 돼서야 끝났다. 앞뒤 합치면 7시간40분짜리였다.
6월의 런던회의는 간담회만 7시간 동안 게속되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하루 한끼만을 먹는 소식주의를 실행하며 해외회의를 이끌고 있다. 이번까지 합해 16차례 열린 해외 현지회의엔 부장·차장까지 포함,모두 1천7백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동경회의에 참석했던 한 임원은 『평소에 회사에서 막연히 느꼈던 불안의 실체를 이번 회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또 앞으로 회사와 직원들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도 알게되었다』고 말했다.
변신을 위한 삼성의 몸부림은 우리나라 최대의 재벌이 수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변하기 위해서 모험을 무릅쓴다는 점에서,어떤 외부적 요인없이 자발적으로 경영의 일대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성이 일으키고 있는 신풍이 다른 재벌그룹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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