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에 치이고 후발경쟁국들에 밀려/철강·유화등 해볼만한 분야도 포화상태투자를 하고 싶어도 투자할 만한 데가 없다. 기업들은 투자할 업종을 찾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남 모르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겉으로는 돈이 없고 정치 등 주변환경도 불안정해 투자를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사정은 그게 아닌 경우가 많다. 투자대상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투자환경이 나쁜 것 못지않게 심각한 투자걸림돌이 되고 있다.
A그룹의 한 전문경영인은 27일 『시설투자를 하려 해도 제품경쟁력을 확실히 갖춘 부문을 찾기가 어렵다. 외국과의 경쟁을 고려할 때 자동차 전자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항공기 조선 정도가 그나마 아직 제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이다. 투자가 가능한 분야가 이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중에서 일부는 이미 투자가 꽉 찼고 투자여지가 남아있는 몇몇 업종이 최근의 투자를 그럭저럭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우리 경제에서 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국산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겪고 있는 경쟁력 상실의 처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품경쟁력은 투자를 좌우한다. 상품경쟁력이 있는 업종으로 투자가 몰리고 경쟁력이 없는 분야엔 투자가 될리 없다. 국산상품이 해외시장에서 위로는 일본 등 선진국의 고기술 고가품에 밀리고 아래로는 중국과 동남아의 저가품에 쫓기듯이 투자도 샌드위치 신세가 돼 있다.
상품 샌드위치론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는 「투자 샌드위치론」은 저가품생산을 위한 설비투자는 중국과 동남아 때문에 할 수가 없고 고기술·고부가가치제품 생산을 위한 투자는 선진국들의 기술이전 기피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산업은행이 해마다 실시하는 기업설비투자 동향조사중 「93년 전망보고서」를 이같은 각도에서 더 세밀히 분석해 보면 국내기업들이 투자할 영역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섬유제품 신발 완구 등의 업종은 제품 경쟁력이 이미 중국과 동남아에 밀려 단순투자를 해봤자 본전을 건지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91년까지만 해도 26.8%의 증가율을 보였던 신발산업의 설비투자는 지난해 30.9% 감소에 이어 올해에도 26.5%가 또 줄어들 전망이다. 섬유제품 역시 지난해 28.1% 감소에 이어 24.4%의 투자감소가 예상된다. 이 정도의 감소폭이면 사실상의 투자 중단상태다.
철강 석유화학 석유정제 시멘트 종이제품 등은 아직 해볼만한 영역으로 분류되지만 이미 과잉투자 상태이다. 87∼91년 5년간 이들 업종의 투자규모를 보며 철강이 11조원,석유화학이 9조4천억원,석유정제가 3조4천억원,시멘트가 2조2천억원,종이가 1조5천억원 등에 이른다. 증가율 기준으로 보면 석유화학의 88년 설비투자 증가율이 80.7%,석유정제의 90년 증가율이 2백7.9%,시멘트의 89년 증가율이 1백17.2% 등으로 도무지 정상적인 행태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과식을 한 후 뒤탈이 생긴 것처럼 이들 업종의 투자증가율은 올해 4∼24%의 감소세로 대폭적인 감퇴가 예상되고 있다. 해볼만한 투자영역은 지난 수년 동안의 과잉투자로 이미 포화상태가 돼버려 더 이상 투자할 여력이 없게 된 것이다.
자동차 전자 항공기 조선 엔진기계 등 업종은 올해 10∼30%의 투자증가율을 보일 전망이다. 특히 제품경쟁력이 확실한 자동차와 전자가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경우 올해의 투자액 2조5천억원중 62%인 1조5천4백억원이 자동차와 전자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자동차와 전자 같은 업종이 또 있다면 투자를 더욱 늘려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업종들이 투자의 활로로 유일하게 열려있는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금부족과 주변여건의 불안정도 분명히 투자를 제약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종속변수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투자를 할만한 영역이 확실히 보여야 투자가 가능하다.
B기업의 한 관계자는 『기업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설비투자가 대략 70%의 미래예측과 30%의 모험으로 이뤄진다고 볼 때 모험을 걸기엔 미래예측이 너무도 부정적이다. 우리 경제가 한편으론 밀리고 다른 한편으론 쫓기는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경제팀이 빨리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역할이 통화나 금리 등 거시적인 대응을 반복할 게 아니라 산업정책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쪽으로 변화·발전해 나가야 핵심적 경제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투자문제도 해결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홍선근기자>홍선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