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빌언덕 없는데 위험부담 피하고 보자”/정책 불확실성도 한층 높아져 “관망작전”기업경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돈(정치자금)만 주면 잡을 수 있었던 든든한 「배경」이 이제는 없어졌다. 정치권이나 정부는 더 이상 유사시에 「비빌언덕」이 아니다. 기업들은 이제 모든 것을 자기 판단하에 결정해야 한다.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않고 망설이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이같은 기업경영환경의 변화에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K그룹의 고위관계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분야를 포괄한 기업경영환경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달라져 기업이 미처 적응하지 못한 채 관망하는 분위기』라며 『그룹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대형 프로젝트를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현재의 정국은 기업측에서 봤을 때 좋든 나쁘든 정치적 격변기임에 틀림없다』며 『개혁정국의 가닥이 완전히 잡혀야 중장기 경영계획을 제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김영삼대통령의 정치자금 안받기 선언으로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겨 버렸다는 점이다. 정경유착은 일제시대 이후 최근까지 대부분의 기업에 있어 기업경영의 절대조건이었다. 정치적 배경의 유무에 따라 기업의 생사가 결정된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치자금은 기업에 있어 부담임에 틀림없지만 경영상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정치적 보험료」 성격이 더 강하다. 수십년동안 요긴하게 활용해 온 「보험제도」가 갑자기 없어져 버린 것이다. 김 대통령의 정치자금 안받기선언 효과는 정부·여당은 물론이고 공기업 은행 등 사회 각 분야로까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정경유착 차단은 기업경영 구조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설비투자에 따른 위험부담을 해당 기업이 몽땅 안게된게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 등 뇌물거래가 관행화되어 있을 때는 정치권력이 방패막이 구실을 해주었다. 정부당국과 주거래은행이 원칙적으로 기업의 위험부담을 같이 나누는 체제였다. 한은특융 구제금융 대출압력 등 관치금융의 남발로 국내 시중은행이 엄청난 부실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리스크부담방식이 과거 기업·정부·은행 등 3자 분담체제에서 이제는 기업전담체제로 정상화된 것이다.
정부정책에 대한 불확실성도 한층 높아졌다. 과거에는 정치자금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고급정보를 빼내 그룹차원의 대책을 세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정책추진을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지금은 정책현안이 수두룩한데도 언제 어떤 식으로 시행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금융실명제 금리자유화 노동개혁 재벌정책(소유분산·업종전문화)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산업연구원(KIET) 관계자는 『재벌정책 노동정책 등과 관련한 정책기조의 혼선이 정부정책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렸다』며 『광복이후 주요 격변기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재계로서는 일단 「기다려보자는 작전」을 펴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시장구조도 기존의 기업으로 봐서는 결코 탐탁치 않다. 정부규제 완화와 시장개방 등은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정부규제는 기존업체로 봐서는 정부보호다. 정치자금을 주고서라도 일단 정부허가를 받으면 사업이 보장됐었다.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으로 투자리스크는 높아지고 투자수익률은 낮아지게 된 것이다.
업계와 정책당국과의 대화단절 현상도 심각하다. 원론적이고 공식적인 얘기는 넘쳐 흐르는데 세부적이고 실질적인 대화는 말라 있다는 지적이다. S그룹 관계자는 『사정활동 때문인지 공무원들이 의도적으로 업계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업계사람들을 「만나서는 안될 사람」 대하듯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거래은행도 마찬가지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은 원칙론만 얘기하고 있고 부총리 등 경제팀도 자신들도 잘 모르는 듯한 「신경제」 논리를 5개월이 넘도록 반복하고 있지만 미시적인 방법론에 있어서는 경제학교과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은행 기업 근로자 등 기업경영에 관련된 주체들이 모두 따라 놀고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래저래 지금의 투자환경은 최악의 상태라고 재계인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이백만기자>이백만기자>
□경영환경 변화내용
●투자리스크
종전:기업·정부·은행의 3자분담체제
현재:해당기업 전담체제(자율적 판단)
●권력층과의 관계
종전:정경유착(정치자금 수수관행화)
현재:유착차단(정치자금 불가,독대채널 없어짐)
●기업정책
종전:재벌보호(형식적인 규제)
현재:재벌규제(소유분산,업종전문화)
●정부규제
리스크 축소기능(경쟁제한)
현재:리크스 확대기능(경쟁촉진)
●정부정책의 불확실성
종전:크지 않음(대부분 사전대비 가능)
현재:증폭(실명제,금리자유화,재벌정책,노동정책,사정개혁 등)
●시장구조
종전:독과점(신규 참입규제,시장 미개방)
현재:경쟁치열화(시장개방 불가피)
●기대수익
종전:높았음(부동산투지 및 인플레소득가세)
현재:고수익·고이윤 기대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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