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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에 거는 기대/이인호(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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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에 거는 기대/이인호(한국논단)

입력
1993.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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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과 모순 가운데에서도 교육의 실패처럼 큰 모순은 없다. 우리의 교육열은 세계 제일이라고 자타가 공인해왔고,사실 국민소득에 비한 사교육비의 지출,교육학 전공자들의 숫자와 정책결정 참여도 등의 기준으로 볼때 결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그런데도 교육이라는 배는 바다로 가는 대신에 산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다. 교육문제에 관한 국민의 관심은 거의 언제나 대학진학 기회의 분배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왔지만,사실 하급학교 교육내용의 질적저하와 청소년층의 정서적 빈곤은 이른바 일류대학에 진학하는데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서장애자들의 비중이 해마다 높아간다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에게는 교육의 양적 팽창은 있었지만 질적 강화는 없었던 것이다. 교육이 무엇하자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없는 가운데서 교육부나 교육기관들이나 관계전문가들이나 학부모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영역확장과 욕구충족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어떤 제도나 교육과정이 피교육자들에게 미치는 교육적·심리적 효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가장 뒷전으로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국민상을 결정하게 되는 하급학교의 교육과정이 여러 학회들간의 영역다툼과 정치적 로비활동의 결과로 결정된다는 것을 교육부 관계자들도 인정한지가 오래된다. 그런속에서 우리의 교육과정은 교육적 필요에 따라 교사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대학들이 마구 배출해놓은 교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그에 맞추는,말하자면 옷에다 몸을 맞추는 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이수해야 하는 과목의 수가 많아진 것도 다 그와 관계되는 이야기다.

대학 수준에서도 정책결정과정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의 이상이 도덕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할줄 알며 창의력을 가진 인간을 배출하는데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혀진채 경제발전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지식인을 훈련시키는데만 국가정책이나 기업체들의 지원정책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구적 지식인으로 전락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체제밖의 비판세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참으로 난처한 기관들이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대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수익사업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신한국을 건설하는데 우선 필요한 것이 관변의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건전한 싹들이 자랄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경정리작업에 불과한 것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국민상을 정립하고 신한국에 걸맞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의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한 대통령직속 특별기구가 필요하고,그 기구는 종전의 기구들과 같이 형식적으로만 대표성을 지닌 유명무실의 기구여서는 안된다.

교육계·학계뿐 아니라 언론계·실업계·여야를 고루 대표하면서 무에서 부를 창조해낸 우리 기업계의 거장들과 같이 우리의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로 그 기구는 구성되어야 한다. 자질구레한 제도적 문제에 손을 대기에 앞서서 우리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성을 가진 정책기조로 표현될 수 있을까 하는 큰문제로부터 국민적 여론과의 넓은 협의와 설득과정을 통해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급하다해도 그러한 기조에 역행하는 제도의 입안과 시행은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들어 적어도 국민교육 수준에서는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 하더라도 거짓말을 일삼고 남을 해치는 이기적인 사람이면 높은 평점을 받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학업평가의 척도를 고치고 아무리 능률적인 제도라해도 피교육자들간에 협동정신을 말살시키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라면 지양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국회 문공위원회가 제대로 구실을 한다면 전국가적 차원에서 앞을 멀리 내다보며 교육의 문제를 다루는 그러한 특별기구의 결정을 강력하게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민족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면에서 따져 볼 때 교육위원회가 가지는 중요성은 방송위원회의 중요성에 뒤질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위원의 임명에 보이는 관심만큼 교육위원 임명에 사회의 관심이 가지않는 것은 그 기구들이 관장하는 예산의 규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직속의 강력한 교육개혁위원회의 발족이 시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기괴한 교육문화적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개혁과 쇄신의 성패는 결국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의식의 각성과 그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교육정책을 펼 것을 교육부 당국과 교육기관들에 끈질기게 독려하는 자세에 달려있다. 민주사회의 주인은 국민이고 책임도 결국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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