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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국민항쟁의 필연적 결과”/「6·29」 진상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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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국민항쟁의 필연적 결과”/「6·29」 진상 무엇인가

입력
1993.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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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전두환 주연 노태우」 정설/전­노 몇차례 회동… 시나리오 만들기 사전 교감/대선염두 “노 단안” 충격용 발표6·29선언의 주체는 누구인가.

87년 6·29선언이 나온 다음해인 88년만해도 6·29는 「노태우의 고독한 결단」 이외의 이설을 용납치 않았다.

그러나 6공화국 출범 1년정도 지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밀려갈 즈음,5공 진영에서 「6·29는 전씨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방증자료와 함께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당시 집권자가 노씨였던 관계로 공론화되지는 못했지만,정가의 뒤안길에서 유력한 비화로 통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금,6·29는 또 다른 차원의 조명을 받고 있다. 6·29는 『국민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필연』이라는 시각이다.

이처럼 6·29 주체를 둘러싼 공방은 단속적으로 계속돼왔다.

6·29 전말은 노씨측이건 전씨측이건 6월1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6월10일은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씨를 간선제 대통령후보로 지명한 날이기도 했지만,6·10항쟁이 일어난 날이기도 했다. 이날 저녁 서울 힐튼호텔에서 노 후보지명 환영리셉션이 열렸으나,서울시 전역을 휩쓴 격렬한 시위와 최루가스로 파티장은 재채기와 불안감으로 가득차 버렸다.

전씨는 파티후 청와대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씨측은 이 시점부터 전씨가 획기적인 난국타개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청와대 통치사료를 담당한 김성익씨는 전씨의 말을 종합정리한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을 통해 그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씨는 6·10후 며칠간의 고민끝에 직선제 수용 김대중씨 사면을 결심하고,6월15일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씨를 안가로 불러 이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2주일전(6월15일)에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검토해보라 했더니 노 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살고,살려고 발버둥치면 죽는다)라고 했어. …중략… 노 대표 개인이 단안을 내린 것으로 내일(29일) 쇼크요법을 쓰자』

김씨는 15일 회동에 대해 전씨가 퇴임뒤에 한 보충증언을 들어 보다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내(전씨)가 설득하니 노 대표가 「김대중씨 풀어가지고 되겠느냐,현행법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대했다.

노 대표가 직선제를 받으면 영웅이 되고 당선된다는 것을 내가 보장한다고 했다. 조직관리나 자금지원은 내가 다해준다고 했다. 그랬더니 노 대표는 「그러면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전씨 증언은 6·29선언의 구체적 방법까지 언급하고 있다. 『며칠뒤 노 대표가 나한테 와서 「내(노씨)가 직선제를 건의하면 대통령의 꾸중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표해버리면 충격효과가 크겠다」고 건의해 왔다. 나(전씨)는 「쇼를 하다 밝혀지면 국민이 어찌 보겠느냐. 차라리 노 대표가 「직선제를 안받아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하라」고 말했다』

이 증언대로라면 6·29는 「감독 전두환 배우 노태우」가 된다. 「노씨만의 고독한 결단」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게 된다.

김씨는 전­노 회동이 17일 19일,24일,27일 네차례 있었고 자신은 27일 전씨로부터 『직선제 건의를 수용하는 담화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당시 공보수석인 이종율씨도 『25일 아침 전 대통령이 김성익비서관과 둘이서 직선제 수용담화를 준비하라고 했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전교감에 대해선 노씨측 인사들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17일 전­노 회동후 노씨는 18일 새벽 연희동 자택을 찾아온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철언씨에게 직선제 수용·김대중씨 사명 등의 성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시 박씨와 함께 일했던 강재섭씨(현 민자당 대변인)도 『18일 박씨로부터 극비 보안을 전제로 한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안기부장한테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유추하면 17일 회동에서 전·노씨가 합의를 이루고 18일부터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87년 6·29선언 당시 청와대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충격받은듯한 제스처를 쓴 것은 대선을 염두에 둔 충격요법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가고 있다.

비단 청와대뿐만 아니라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도 선언 하루전인 28일 노씨 보좌역이었던 이병기씨(전 청와대 의전수석·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에게 부탁해 강씨로부터 사본을 미리 입수 6·29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노씨측은 전씨와의 상의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6·29를 전씨의 지시에 의한 시나리오로 등식화하는데에는 동조하지 않고 있다. 이병기씨는 『노 대표는 6·10 시위를 보고 직선제 등의 시국타개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 대표는 그즈음 많은 인사들을 만났고,대부분의 충고가 직선제 수용이었다. 어찌보면 전 대통령도 그중 한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백번 양보해 노 대표가 전 대통령과 긴밀히 협의했다 하더라도 기득권을 포기한채 이를 받아들여 대통령 당선이라는 산물을 창출한 것이 그의 공』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노씨가 전씨에게 직선제 수용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도 다른 자리에서는 수용의사를 피력한 경우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측근 이병기씨나 박철언씨외에도 당시 청와대 수석중 K씨도 6·10 직후 이를 들은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씨가 직선제를 설득했건,노씨가 이를 적극 수용했건간에 6·29는 당시 시국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민정당 국책위원으로 노씨 측근이었던 최병렬씨(현 민자 의원)는 『6·29는 작전이나 선택차원에서 보면 안된다. 그 길밖엔 다른 길이 없었다. 전 대통령은 군동원을 고려했으나 결국 못했다. 파국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넥타이 맨 시민마저 시위에 참가한 시국에서 6·29는 시기선택만 유동적일뿐 외길의 선택이었다. 노 대표가 그래서 「항복」이란 말을 쓰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있다.

6·29는 국민의 힘,민주화 열망이 만들어냈다는 논지이다. 이 논지에는 노씨측이건,전씨측이건 이론을 달지 않는다. 큰 틀에서 보는 6·29는 정리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대세를 엮는 과정에서 누구의 역할이 더 컸느냐는 부수적 부분에서만 이론이 있을 뿐이다.<이영성기자>

▷6·29선언 8개항◁

①대통령직선제 개헌

②대통령선거법 개정

③김대중씨 등 사면복권,구속자 대폭 석방

④기본인권의 최대한 신장

⑤언론자유 보장의 획기적 개선

⑥지방·교육자치의 조속한 실현

⑦정당활동 보장·대화풍토 조성

⑧사회비리의 과감한 척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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