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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평화/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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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평화/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3.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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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6월21일) 열린 「고은문학의 밤」은 연강홀의 5백석을 가득 메울만큼 관심 모은 모임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배우들이 고은 시인의 시편들을 낭송하고 후배시인들이 축시를 읽었으며 시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가 가수에 의해 불려졌는가 하면 시인 자신이 「백두산서기」 등의 자작시를 드러매틱하게 읊었다.한 생존시인을 위한 문학축제는 흔한 일이 아니다. 지난 91년 10월 서정주시인의 처녀시집 「화사집」 50주년을 기념하는 「미당시제」가 열린후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한 시인에게 바치는 이런 경의는 어떤 기념비 이상으로 영광된 것이다.

「고은문학의 밤」은 시인의 회갑과 시력 35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회갑을 넘긴 우리나라 유명시인이 한둘이 아닌데 그들이 회갑 때마다 문학잔치를 했던 것이 아니요 시력 35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시력이 40년도 넘은 여러 시인들이 다 기념행사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유독 고은시인은 왜일까.

물론 그는 유별난 인간으로 소문난 시인이다. 그는 허무와 구도와 광기와 기행의 연대를 지나온 인생역정 자체가 다른 시인과 사뭇 다르다. 그리고 그는 「투사」였다. 이런 다양한 체험들이 그의 문학의 색채에 여러가지 물감을 섞어왔다. 그의 문학은 목소리가 다채롭고 시 말고도 소설,에세이,평론 등 장르를 무시로 넘나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무서운 문학적 생산력이다. 광천처럼 언제나 용솟음치는 상상력의 샘은 길어도 길어도 마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낸 1백여권의 저서는 우리나라에서도 기록적이다. 요즘도 매일 60장 이상씩의 원고지를 메워간다. 이런 정력만으로도 고은시인은 불로의 회갑을 축하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의 밤」이 갖는 뜻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립해 초대 대표간사가 되고 1987년 이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후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한때는 내란음모죄로 2년간 감옥살이를 함으로써 재야 반체제문인의 대표격으로 기억되어온 사람이다. 문민정부의 시대를 맞으면서 자기문학의 피로연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이런 경력의 그로서는 실로 「20년만의 외출」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그의 문학은 얼마든지 출판되고 시인 자신은 아무리 활보하고 다녔다고 하더라도 고은이란 이름은 항상 「재택중」의 느낌이었다. 마침내 그는 만인이 환시하는 높다란 단위에 불려나와 세워졌다. 그단이 범문단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것이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의미였어야 옳았다. 그것이 기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 밤은 그 성황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역시 반문단의 잔치에 그쳤다. 작가회의 계열의 문우들외에는 문협쪽은 물론 순수문학 작가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속에 상관 없이라도 젊은 날이 고은 시인과 날마다의 밤을 같이 새우던 그 수 많은 문단의 주우들도 모습을 볼수가 없었다. 누가 아직도 이들을 이렇게 서로 갈라놓고 있는가.

고은시인은 80년대 후반무렵부터 민중문학 자체내의 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 들면서는 민족·민중문학이 소위 「농성문학」에 웅거할 것이 아니라 자기해방을 통해 어떤 경향과도 아우르는 열린 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90년대는 의견이 상치된다고 해서 적으로 규정하는 현실을 타파하고 평화관계 유지에 역점을 두어야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이제 운동의 깃발을 내리고 모든 문학인은 문학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금년 1월의 작가회이 총회에서도 『지금까지는 민족문화단체로서 운동에 치중해왔으나 이제부터는 문학행위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외쳤다. 고은 개인은 이런 입장의 시인이다.

광복직후 남북의 분단은 국토만 쪼갠 것이 아니라 문단도 쪼갰다. 자랑스러웠던 우리 문학은 두동강이 났다. 통분할 반쪽의 상실이었다. 6·25이후 50년대와 60년대의 한국문학은 그 상실의 분한을 달랠 수 있을만큼 성과가 눈부셨다. 하나의 황금기였다. 모두 어깨동무한 동행자들이었다. 70년대 들어서 문단은 순수냐 민족이냐로 다시 갈렸다. 이 대립구조가 한국문학의 크기에 무엇을 보태었던가.

「고은 문학의 밤」에서 「성묘」라는 시가 낭송되었다.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북통일만 아직 안된 것이 아니라 남남통일도 아직되지 않고있다. 우리문학의 역량을 적대로 낭비하고 있을때가 아니다. 이제 시대도 바뀌었다.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다. 문우끼리 외면해서는 안된다. 고은시인의 외침대로 모든 문학인이 문학으로 돌아올때 서로 얼굴을 웃으며 마주보게 될 것이다. 순수문학 진영도 민족문학 진영도 세대가 자꾸 바뀌어간다. 갈수록 단절의 골은 더 깊어진다. 지금이야말로 문단의 평화가 절실하다. 「고은 문학의 밤」은 그 화해의 좋은 기회였다. 참으로 아깝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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