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횟집찾은 YS 친필휘호가 화근/“야당놈” 지목 한달곤욕후 병사/자신도 홧병얻어 집안 풍비박산『남편이 목숨까지 빼앗기며 바랐던 문민시대가 됐으니 피맺힌 한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김영삼대통령과의 작은 인연 때문에 남편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희생당한 김부칠씨(55·여·강원 강릉시 저동 산1)는 가보처럼 아끼는 「대도무문」 친필 휘호를 쓰다듬으며 눈물부터 쏟았다.
김씨의 남편 김광수씨(80년 당시 46세)는 김영삼대통령이 신민당 총재로 야당을 이끌고 있을때 강원도 제3지구당(삼척·명주·양양) 총무부장으로 김명윤위원장을 돕고 있었다.
김 총재는 지구당 순시때 김씨가 경영하고 있던 경포대의 「낙원횟집」에 수행원들과 함께 두어차례 들러 야당생활의 고달픔을 잠시 달랬고 김씨부부는 김 총재가 좋아하는 가자미회를 대접했다고 한다.
김 총재는 감사와 격려의 징표로 「김광수동지」에게 「대도무문」 친필휘호를 써줬고 김씨는 휘호를 장롱에 보관하며 큰 자랑으로 여겼다.
평소부터 『야당놈』이라고 김씨를 곱지않게 보던 정보과 형사들은 그뒤 횟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꼬투리를 잡다가 마침내 80년 8월6일 새벽 선친의 제사를 막끝마친 김씨를 수갑채워 끌고갔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삼청교육대로 넘겨지기전 9일간 경찰서에 머무는동안 매일 찾아가 『남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재발 눈감아달라』고 매달리기도 했지만 죄목조차 듣지 못했다.
한달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온몸에 피멍이 들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물어도 남편은 묵묵부답인 채 한숨만 내쉬었다. 삼청교육 후유증으로 병원신세만 지던 남편은 2년이 못돼 세상을 떴고 김씨는 홧병을 얻은 자신의 병치레로 횟집까지 팔아야 했다.
두아들과 출가한 두 딸도 김씨를 도울만큼 여유가 없어 김씨는 병든 몸으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며 연명해 나갔다.
지금은 보다못한 이웃들이 돈을 모아 경포대에 차려준 2평 남짓한 구멍가게로 생활하고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가 응어리진 우리 가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줬다』며 김씨는 눈물끝에 보일듯말듯한 입가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또 『남편이 살아있으면 내년이 환갑』이라며 『남편과 가족의 억울함이 풀어지고 명예가 회복되길 간절히 바랄뿐』이라고 울먹였다.
삼청교육대 진상규명전국투쟁위원회(위원장 한선수·53)는 김씨의 남편처럼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요즘도 한달에 한두명씩 숨지고 있다고 말한다.<강릉=최성욱기자>강릉=최성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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