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어느 지방의 음악제에 한 익명인이 1백프랑을 기부했다. 1백프랑이라면 우리 돈으로 1만원짜리 한장 정도의 가벼운 액수지만(환율로는 1만4천원) 그 성의가 오히려 거금보다 따뜻하고,이름을 밝힐만한 크기의 독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운듯이 가만히 감추면서 내미는 손이 가상하다. 이런 손이 있으므로 자그만 지방도시가 큰 음악제를 열 수 있다.또 프랑사의 남부지방인 페르피냥의 한 공증인은 매년 여름이면 자신의 별장을 작가들의 창작실로 개방한다. 작가는 누구나 남불의 뜨거운 태양과 함께 무료로 이 집을 자기 별장처럼 이용할 수 있다. 예술가들을 위해서는 사가가 곧 공가라는 이 조그만 생각이 그 나라의 큰 예술을 키운다.
다시 프랑스의 한 영화감독은 가까운 친구들이 돈을 모아 주어서 영화를 제작했다. 장사를 위한 출자가 아니라 친구의 재능을 살리기 위한 출연이었다. 이런 돈으로 아무렇게나 영화를 만들어낼 무책임한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런 영화로 영화대국이 안될 멍청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무명의 개인들이 구석구석에서 문화예술에 물을 주고 있다. 이런 감추어진 이름들이 유명한 이름을 재배해낸다.
미국을 복지사회로 이끌어가는 것은 정부나 기업보다는 비영리단체와 개인의 자원봉사자들이다. 미국에서 사회사업에 기부되는 돈은 한해에 1천5백억달러가 넘고 이 자금원의 80% 이상이 개인이다. 나머지를 기업이나 재단에서 내놓는다. 기부금중 문화예술부분에 할당되는 것이 7% 가량이지만 액수로는 막대하다. 연방정부 레벨의 문화지원기구인 NEA(국가예술기금)의 연간 예산 1억7천만달러는 나라 전체가 문화에 지출하는 액수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기업과 재단과 개인이 댄다. 그 가운데서도 지배적인 후원자가 기업 아닌 무수한 일반 개인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또 자원봉사의 노동량이 연간 7백50만명분으로서 금액으로 환산하면 1천5백억달러어치에 이른다. 그 상당부분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한다. 시민들이 공연장이나 미술관에서 무료봉사를 해 도운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의 격차가 있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소득보다 인식의 격차가 더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예술의 지원을 위한 개인들의 후원모임이 차츰 생겨나고는 있다. 금년들어 국립발레단이 국고지원을 받는 국립예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법인단체와 개인을 참여시킨 후원회를 결성했고 서울예술단도 얼마전 후원회를 발족시켰다. 극단들은 오래전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대개 창단때의 일회용에 그치고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있는 극단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체 아닌 한 개인을 위한 색다른 후원회로 연극배우 박정자씨를 돕자는 「꽃봉지회」라는 것이 있다. 2년전에 발족한 이 모임은 정회원 16명,일반회원 1백50명으로 구성되어 회원들은 매년 회비를 낸다. 그 기금으로는 박정자씨가 출연하는 모든 공연작품의 입장권을 구입해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준다. 이것이 그 극단에 대한 간접지원이 된다. 작년 가을 이 회원들의 상견모임이 열렸을때는 대개 주부인 회원들끼리 아마추어 촌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런 정열과 애정이 대배우를 미는 힘이지만 대배우를 밀다보면 스스로 배우가 되고 싶어진다.
무대예술뿐이 아니다. 다시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미술관을 살리는 것도 일반 개인들이다. 미국의 많은 미술관들은 회원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시민들이 한해에 몇십달러 정도의 회비를 내면 무료입장,구내매점 할인,강좌안내 등의 특전을 준다. 이 작은 돈들이 모여 좋은 그림들을 사들인다.
미국만도 아닐 것이고 미술관만도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문화시설들을 이런 개인의 참여로 활성화시킬 수 있다.
기업들의 큰 손만 손이 아니다. 문화예술은 기업의 시혜만 시주처럼 바라고 있다. 시민들은 문화예술을 끌어올리는 것이 자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바위 덩어리이기나 한 것처럼 외면하고 기중기만 기다린다. 아직은 국민의 생활수준이 문화지원을 기업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기업이 봉은 아니다. 시민 개개인부터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 액수의 다과에 상관없다. 문화에의 참여의지가 더 귀하다. 생활수준을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꼬박꼬박 「촌지」봉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속에서 살아왔다. 이제 그 촌지만큼만 문화에 돌리면 된다.
정치인들도 차츰 개인 후원회를 만들고 있다. 깨끗한 정치를 밀듯이 좋은 문화를 살려야 한다. 문화의 「파트롱」은 명예롭다. 본시 예술의 파트롱은 예술가가 되다만 예술가다. 한 예술가를 지원하거나 예술단체 후원회의 회원이 될때 「꽃봉지회」의 회원들처럼 누구나 어느새 절반은 예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회원권의 시대에 문화관계 회원권 하나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야 한다. 문화의 멤버십카드를 내보일때 헬스클럽 멤버십의 카드보다 적어도 덜 자랑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는 모든 객이 주인이 되고 싶을때 살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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