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량·지질등 주먹구구식 사전 조사/당시 위압분위기 눌려 마지못해 협조평화의 댐 정부가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견해를 외면한채 「관제여론」까지 만들어 무리하게 밀어붙인 공사였음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당시의 경직된 사회분위기에 위압감을 느껴 마지못해 협조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당시 토목학회 회장이었던 최영박씨(수원대 총장)는 『댐건설공사 착공전에 강수량,지형,지질조사 등 최소한 3년간의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데도 북한의 금강산댐 착공사실이 알려지자 불과 한달만에 대응댐의 위치와 규모가 결정돼 학계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는 86년 10월23일 북한의 금강산댐 착공사실이 내외통신에 보도된후 한달만인 11월26일 높이 2백m,길이 1천1백m 규모의 대응댐 건설계획을 발표,3개월만에 서둘러 착공했다. 최 교수 등 토목 및 수리학 전문가들은 정부가 댐위치를 선정할 때 학계와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자신들은 철저히 배제됐었다고 주장했다.
건설부에서 대응댐 건설의 실무를 맡았던 H국장도 『학계에 능동적으로 자문을 구한 적은 없으며,북쪽에서 물을 막게 되면 남쪽의 수자원이 부족해지고 생태에 변화가 온다는 문제를 학계와 논의한 적은 있다』고 밝혔다.
학계에선 안기부의 수공위협론과 건설부의 대응댐 건설 발표에 많은 의구심을 가졌고 일부는 비판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 의견도 안기부의 공작으로 일절 여론화되지 못했고,오히려 일부 학자들은 정부의 수공위협설을 적극 홍보하는 태도로 일변했다.
실제로 정부의 대응댐 건설 발표직후 본지 과학부가 모대학 C교수와 전화인터뷰를 했을 때는 비판적인 의견이었으나 이튿날 태도가 변해 대응댐 건설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 L교수는 『당시 안기부의 분석은 주먹구구식이었다』며 『북한이 금강산 산자락위에 성같이 댐을 쌓아 2백억톤을 저수한다는 분석은 어린아이도 웃을 일』이라고 말했다.
L교수는 단순히 북한이 최대규모의 댐을 건설한다는 1차 정보에 의해 지형과 강수량 지질 등에 관한 연구검토도 없이 2백억톤 운운한 것은 중대한 실수이거나 계산된 정치수법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우리측의 대응댐 건설 발표 한달후 금강산댐 백서를 통해 북한강과 임진강 지류에 4개의 댐을 막아 도수터널을 통해 동해안쪽으로 물을 빼내 발전할 계획이라며 4개 댐의 총저수량은 26억톤이라고 발표했었다.
많은 교수들은 이때 안기부의 1차 분석대로 북한에 금강산댐이 건설된다해도 최소한 5년 이상의 공기가 소요되고,2백억톤이 저수되려면 15년 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또한 이 댐을 건설하기에 앞서 가물막이를 해서 이를 서울올림픽에 맞춰 일시에 방류한다는 가설에 대해서도 그만한 양으로 한강수위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대응댐을 그렇게 서둘러 건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정부의 가설은 억지춘향이었으며 거기에 맞춰 국민성금을 식구수에 따라 강요당했던 당시 상황이 서글프기만하다』며 『우리집 아이가 성금 1천원을 갖고 가지 않아 담임선생한테 손바닥을 맞은 일도 있다』고 말했다.
교수들의 이런 반론은 당시 사회분위기에 묻혀 전혀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C교수는 모처의 요청으로 북한의 수공위협과 대응댐의 건설이유에 관한 자문에 응했지만 모처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정부는 획일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86년 11월27일 사학연금회관에서 학술연구발표 추진협의회라는 급조된 단체를 시켜 「북한 금강산댐 건설의 영향평가 및 그 대책에 관한 학술세미나」를 열어 교수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했던 서울대 S교수는 『발표자로 나서기 싫었지만 동료교수의 권유에 못이겨 참석했다』고 말했다.<임재만기자>임재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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